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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글을 읽으며 내내 추측하던 것인데 한켠의 무대가 되는 C시는 역시 내 고향이 맞았다. 내내 익숙하던 지명에 익숙한 풍경들을 이입하며 글을 읽는 재미도 나름 쏠쏠했다.

0-2. 제목에는 출판한 햇수만 쓰고 출판사를 쓰지 않았는데 내가 읽은 것은 2006년에 나온 이병주 전집의 것이었기 때문.

1. 이런저런 이야기들과 감상들이 있지만 거개가 지난 메모에 써둔 것과 별 다르지 않거니와 쓸데없이 소설의 내용을 털어놓는 것도 장래의 독자들에게 그닥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아 진부한 감성을 늘어놓는 짓은 생략하고 싶다만은.

2. 결국 '관부연락선'의 주제의식 양 극단의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에서 먹물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정도로 수렴된다. 어쩌면 이병주는 이 소설을 통해 이념이 과잉하던 시대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것일 수도 있고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좌익과 우익이 각자 떠들어대는 것처럼 특정한 이데올로기의 배타적이고 압도적인 승리로 성립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러한 체념들이 모이고 모여 만들어진 그런 어떤 것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3. 세상은 아직도 극단적이고 이념은 다시 과잉상황으로 돌아가는 듯 하다. 나는 어디에 서있어야 할까. 유태림인가 강달호인가 이광열인가 아니면 이선생인가. 한가지 확실한 것은 E처럼 팔짱끼고 멀리서 모른 척 바라볼 수 있는 처지는 아니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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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13 22:55 2009/07/13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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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살아가면서 필요한 여러가지 능력 중에 '통찰력'이라는게 있는데 이게 유독 내게 부족해서 난감한 경우가 많다. 쉽게 말해서 어떤 사물 혹은 사건을 관찰하는데 있어서 단숨에 전체 그림을 그려내지를 못한다... 뭐 대충 이런건데 그런 탓에 내 기억 속에 무의미하게 흩어져있는 수많은 편린들이 어떤 계기로 인해서 하나로 조합되기 전까지 큰 그림을 제대로 그리지 못한다. (이 때문에 공부의 길을 걷는데 있어서 애로사항이 꽃핀다. 아오.)

0-2. 하지만 그 반대급부도 있는데 그런 식으로 산포된 작은 조각들이 하나의 논리회로 속에 재배치되는 순간은 매우 즐거운 순간이라는 것. 최규석을 알게 된 것도 얼추 그런 과정이라고 하겠다.

1-1. 몇 년 전에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를 처음 보고 꽤나 충격을 받았었다. 뽀송뽀송한 동화를 냉정한 현실 속에 녹여냈을 때 그것이 얼마나 그로테스크해질 수 있는지를 깨달은 덕분이었다.

1-2. 한겨레에 연재되었던 '습지생태보고서'를 보고 '뭐 이런 쌈마이색기들이 다 있어...' 했던 기억이 난다. 어딘지 모르게 리얼맞은 궁상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연신 사각 컷 속의 이죽거리는 그 웃음들을 보며 은근한 일치감 및 위화감을 느꼈다. 하지만 사실... 그다지 와닿는 만화는 아니었다.

1-3. 제발로 영화를 보러 가는 일이 가히 연례행사 수준인 나도 가끔 미친 척하고 혼자 극장을 찾는 경우가 있다. 그날은 아마 '필승 연영석'을 보러 갔던 것 같은데 영화 시작 전에 새로 개봉하는 옴니버스 애니메이션 예고편이 나왔다. '사랑은 단백질'. 나오는 인물들이 '습지생태보고서'와 같다는 생각은 못했고 그저 상상력이 굉장하다는 생각만 했다. 배를 뜯기고 애처롭게 청테이프로 제 배를 붙이던 저금통 돼지의 식은 땀을 보면서.

1-4. 아마도 무슨 자료를 찾는 중이었을거다. 80년대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어느 사이트에서 문득 찾게 된 만화, '100℃'. 독자의 직접적인 감정에 호소한다는 점에서 강풀과 유사했지만 화법의 직접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오히려 강풀보다 더한 화법을 택하고 있었다. 혹자는 이 세련된 시대에 이렇게나 투박하고 무식한 내지름을 보면 구시대적인 화법이라 냉소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의 화법이야말로 가장 의미있는 화법 중 하나 아니던가. 먹먹한 가슴과 액체가 그렁그렁한 눈시울로 작가 이름을 찾아보았다.

1-5. 최규석이라는 이름으로 위의 모든 작품들이 하나의 회로 속에 위치하게 되었다.

2. 가난했던 가정환경과 찌질했던 과거에 대한 추억 하나쯤 안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없는 사람도 당연히 있다.) 지금이야 살림이 많이 여유로워졌지만 우리 집의 과거도 평균 이하의 경제능력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작은 도시 근교의 농촌에서 살았던 나 역시도 콧물 빨아가며 삘기랑 산딸기 뜯어먹어가며 자란 기억이 있다.

3-1. 한국현대사의 비극은 우리의 삶을 그저 가감없이 드러내기만 해도 이미 그것만으로 폭력과 독재, 수탈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게 된다는 점이다. 해방 이후의 한국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근대권력의 모순 속에 스스로를 위치시키는 일이었고 따라서 우리들이 살아왔던 바로 그 궤적이 근대권력의 모순이 발현되는 그 지점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일은 이미 그 자체로 현실을 고발하는 성격을 지니게 될 수 밖에 없다. 대한민국 원주민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면 그 이유는 아마 거기에 있을 것이다.

3-2. 하지만 이 책의 미덕은 그 정도에서 끝나지 않는다. 아니 그 정도에서 끝났다면 흔한 대자보 만화와 다르지 않았겠지. 쓸데없는 감상과 치장을 넣지 않았기에 궁상맞지도 않다는 것. 아마 그것이 이 책의 또 하나의 미덕이리라.

4-1. 꼭 내 얘기하는 것 같아서 깜딱 놀랬던 페이지 하나. 좀 길어도 여기에 다 쓸란다.

  (전략) 내 마음 깊숙한 곳에는, 도시에서 태어나 유치원이나 피아노학원을 다녔고 초등학교 때 소풍을 엄마와 함께 가봤거나 생일파티라는 걸 해본 사람들에 대한 피해의식, 분노, 경멸, 조소 등이 한데 뭉쳐진 자그마한 덩어리가 있다. 부모님이 종종 결혼을 재촉하는 요즘 이전에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어쩌면 존재하게 될지도 모를 내 자식을 상상하게 된다.

  상상하다보니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 아이의 부모는 모두 대졸 이상의 학력을 가졌을 가능성이 크고 어버지는 화려하거나 부유하지는 않아도 가끔 신문에 얼굴을 들이밀기도 하는 나름 예술가요 (중략) 집에는 책도 있고 차도 있고 저만을 위한 방도 있으리라. 그리고 아버지는 어머니를 때리지도 않을 것이고 고함을 치지도 술에 절어 살지도 않을 것이고 피를 묻히고 돌아오는 일도 없어서 아이는 아버지의 귀가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리라.

  그 아이의 환경이 부러운 것도 아니요, 고통 없는 인생이 없다는 것을 몰라서 하는 소리도 아니다. 다만 그 아이가 제 환경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제 것으로 여기는, 그것이 세상의 원래 모습이라 생각하는, 타인의 물리적 비참함에 눈물을 흘릴 줄은 알아도 제 몸으로 느껴보지는 못한 해맑은 눈으로 지어 보일 그 웃음을 온전히 마주볼 자신이 없다는 얘기다.


4-2. 그리고 만화도 한 토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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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5 10:38 2009/07/05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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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솔직히 말하자면 좀 불편하다. 앞에 쓴 '러시아 혁명과 레닌의 사상'도 그렇고 이것도 마찬가진데, 이처럼 근본적이고 강퍅한 이야기를 던지는 책이 나는 솔직히 좀 불편하다. 당장 내가 원칙주의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가 한 때 상당한 수준의 원칙주의자였음을 상기한다면 이런 마음의 무거움은 더해진다. 거기다 며칠 전 어떤 술자리에서 한 선배에게 "그건 너무 근본주의적이에요."라고 대들었던 것까지 생각하면야.

1-2. 최근에 잠시 김규항을 멀리 했었다. 몇 가지 일들이 누적되어서인데 김규항이 일반적인 안건들에서 보여주는 올바른 자세들이 어떤 특정한 사안들에 대해서는 전혀 발휘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음을 발견해서였다. 하지만 최근에 그러한 이유만으로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것은 생각 외로 편협한 짓임을 깨달았다.

2. '종교'라는 키워드 역시 내가 오랫동안 고민하고 있는 주제 중 하나인지라 이런 식의 글을 보면 내심 많이 반갑다. 꽤 여러 해 전부터 인간에 대한 존중과 사랑을 폐기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종교 하나쯤 가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고민을 계속하고 있기도 하고 말이지.

3-1. 김규항이 이 책 내내 천착하고 있는 것은 당대의 맥락에서 예수를 바라보는 일이다. 현재의 사람들은 성경에 기록된 예수의 기적들을 두고서 그것이 진실이냐 아니냐는 식의 아둔한 논쟁에 빠져있지만 김규항은 복음서가 지어지던 당대의 맥락과 예수가 가지고 있던 사상의 일관성에 근거하여 성경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 기존의 예수가 가지고 있던 이미지가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반말이나 찍찍 뱉으면서 세상에 체념하고 마음수양이나 할 것을 설파했던, 지금 우리가 매일 TV에서 만나는 정치인 혹은 흔한 종교인들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면 김규항이 이야기하는 예수는 사회적 소수자들에게도 동등한 사회적 지위를 복원시켜주고 사회적 불의에 눈감지 않으면서도 매일매일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다.

3-2.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기성 사회와 불협화음을 일으키지 않은 종교란 없었다. 예수는 권력화된 유대교와 로마의 압제에 항거했고 불교는 카스트제도의 몰인간성과 맞섰으며 이슬람교 역시 기존의 권력과 끊임없이 마찰했다. 하지만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종교는 이미 그 자체가 권력이 되어있거나 혹은 권력과 불화하지 말 것을 설파한다. 우리는 예수와 석가모니의 삶과 고민을 얼마나 이어받고 있을까.

3-3. 박완서의 글이었을거다 아마. 새로 태어난 아이에게 많은 사람들이 축복의 말을 건네면서 누구처럼 되어라 어떻게 되어라하고 덕담들을 건네지만 예수님처럼 살거라라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예수처럼 산다는 것이 돈과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이상을 말함을 모두 다 알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4. 신앙의 힘이란 무엇일까. 종교의 미덕이란 무엇일까. 고민이 오늘 조금 더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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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4 17:19 2009/07/04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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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잘 따져보면 자연계와 인간계(물론 이 두 가지가 딱 잘라 구분되는 건 아니지만)는 참 닮은 구석이 많다. 특히 '변화'라는 측면에서는 더 그렇다. 자연계의 변화를 연구하는 것이 아마도 진화론일텐데 이 진화론에서 진화를 설명할 때는 점진적 변화가 누적되는 것이라기보다는 돌연변이나 어떤 특정한 사건을 통해 급진적인 변화가 단번에 일어난다고 이야기한다. (부디 맞길. 난 자연과학과 안 친하거든.)

1-2. 아마도 인간계에서는 '혁명'이 그러한 사건에 속할거다. 가장 짧은 시간 내에 가장 많은 것들이 변화하는 일련의 사건의 덩어리들. 우리가 혁명이라고 부르는 역사적 사건이란 대개 이런 것들이다. '혁명'이라 하면 얼핏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몇 가지 사건들이 있지만 역시 '혁명'이라고 할 때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지고 동시에 가장 많은 오해를 받고 있는 것은 단연 러시아혁명이다.

2-1. 러시아 혁명의 비극의 씨앗은 그것의 무대가 러시아였다는 사실에 있었다. 애초의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에 의한다면 사회주의 혁명은 러시아가 아니라 서유럽 국가에서 일어났어야 했다. 미성숙한 부르주아 계급과 노동자 계급, 여전히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농민 계급, 일천한 민주주의적 경험 등은 애초부터 러시아 혁명을 제약하는 조건들이었다. 사회주의의 터전이 마련되지 못한 곳에서 사회주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이 뭔가 와꾸가 영 안 맞는 상황.

2-2. 물론 이 점은 러시아의 사회주의자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러시아 혁명의 운명이 러시아에 있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영국이나 프랑스와 같은 서유럽 국가에서 동시다발적인 사회주의 혁명이 발생하지 않으면 낙후된 러시아의 사회주의도 얼마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를 어쩐담. 서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은 하나같이 캐발렸다는 거. 거기다 혁명 이후 발발한 백군白軍과의 내전, 세계대전의 여파 등을 거치면서 혁명의 중추를 담당했던 노동계급도 점차 힘을 잃어갔다. 그렇다. 가만 있어도 입에서 욕이 나오는 존니 난감한 상황.

2-3. 힘을 잃은 혁명의 속에서 반反혁명의 기운이 움트는 것은 어쩌면 당연지사일지도 모르겠다. 민주적 기반이 붕괴됨과 발맞춰 스탈린이 급부상했다. 뭐 여기부터는 모두들 잘 알고 있는 바와 같다. 그 이후 전세계의 사회주의 혁명은 스탈린의 지도 아래 두 가지 중 하나의 결과를 맞이했다. 캐발리거나 위성국가가 되거나.

3.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이제 얼추 100년이 다 되어가는 이 시점에 볼셰비키의 원칙을 되살리는 일은 사실 아무리 봉실봉실한 언어를 사용한다해도 다소간의 불편함을 동반하는 일이다. 게다가 요즘과 같은 포스트 뭐시깽이의 시대에 계급이니 노동이니 투쟁이니 하는 소리는 아무래도 얼추 한 20년 쯤 전의 화석언어 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강퍅한 원칙주의에 좀 더 공감해야 할 의무가 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거의 모든 권리는 그 강퍅한 원칙주의적 혁명이 달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4. 혁명은 많은 변화를 수반하는 동시에 가장 많은 가능성을 열어놓는 시기이기도 하다. 모종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혁명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상가집에서 옛친구들 만난 자리에서 술 몇 잔 마시고 혁명이니 쟁가니 부르는 짓거리들은 이제 좀 그만두자. 쪽팔리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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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4 16:28 2009/07/04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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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도 여기저기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책이라 여기서 내가 뭐라뭐라 말 붙이는 것도 낯간지럽긴 하지만 그래도 꼭 한 마디 정도는 해야겠다 싶어서 짤막하게 정리해본다.

2-1. 이 책에 대한 가장 무식한 오독 중의 하나가 "아 ㅅㅂ 그러면 '민족'이란게 있지도 않은걸 뻥치고 있는 소리란거냐"라는 건데, 꼭 제대로 안 읽어본 애들이 제목만 보고 그런 말씀들을 하신다니깐요.

2-2. 물론 그러면서 이런 소리는 한국의 역사에는 적용이 안 돼...란 소리가 따라오는데 저도 결코 이걸 '적용'할 생각은 없습니다...라는거. '적용'하려고 읽었다면 그것도 그렇게 무식한 소리가 없는거거든요.

3.
겔너(Gellner) "민족주의는 민족들이 자의식에 눈뜬 것이 아니다. 민족주의는 민족이 없는 곳에 민족을 발명해 낸다(강조는 본문)"라고 얼마간 잔인하게 규정했을 때 위와 유사한 논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공식화의 결점은 민족주의가 잘못된 구실 아래 가장하고 있다는 점을 너무 애쓴 나머지 '발명'을 '상상'이나 '창조'보다는 '허위날조'와 '거짓'에 동화시킨(강조는 Dog君) 것이다. (p. 25.)


민족주의는 의식적으로 주장된 정치적 이데올로기와의 결합에 의해서가 아니라, 민족주의 이전에 있었던 더 큰 문화체계와의 결합에 의해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민족주의는 그 문화체계로부터 나왔고 또한 그 문화체계에 대항하여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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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3 21:56 2009/01/23 21:56
1.
  맥아더(Douglas MacArthur)와 워싱턴이 북한에게 사실상 '무조건 항복(unconditional surrender)'을 재차 요구하고, 무엇보다 중국의 참전에도 불구하고 적의 절멸을 추구할 때 그것은 이미 제한전쟁일 수 없었다. 미국에게는 기본적으로 제한전쟁의 개념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의 제한전쟁은 능동적으로 선택된 전쟁전략으로서가 아니라, 중국의 압박에 의해 불가피하게 강요된 피동적 전쟁전략이었다. (p. 25.)

2.
  최근 우리는 한국전쟁의 시작을 포함해 미국의 북진 및 한만국경 진격이 전부 오인(misperception)의 산물이었다는 전통적인 국제정치적 해석의 뚜렷한 재등장을 목도한다. 이에 따를 때 한국전쟁은 끝없는 오판의 연속이었다. (중략) 그것은 자료들이 보여주듯 오인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일부 그것을 포함해, 기실은 일관된 어떤 전략과 정책, 그리고 그것들이 체제이념 및 세계관의 산물이었다. (p. 27.)

3.
  6.25는 통일시도의 계기인 동시에 사회의 모든 수준에 폭력의 만연을 가져온 계기였다. 개인 수준의 자기생존의 추구와 타인살해의 시도는 사회수준에서는 절멸주의로 연결된다. 폭력의 증가는 가공할 학살로 나타났고, 사태가 역전되었을 때는 다시 끔찍한 보복이 기다리고 있었다. 곳곳에서 피의 보복이 진행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폭력의 악순환"이었다. (p. 262.)

4.
겹겹이 떠오르는 장면들로 인해 쏟아지는 눈물을 참고 어떻게든 이성적으로 정신을 추스르고 차분하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서술해야 하는 연구자의 위치는 참으로 고통스러운 것이다. 이 비극의 현장으로부터 차라리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다. (중략) 슬픔은 자주 이성의, 그리고 지혜의 단초가 된다. 《성서 시편》의 구절처럼 전쟁과 전쟁 연구의 양자 모두에 있어, 긴 역사발전의 지평에서 우리는 미래를 위해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시편 126:5~126:6) 심정으로 광풍의 시대의 아픔과 죄악을 들추어내고, 비판하고, 규명해야 한다. (p. 385.)

5.
전쟁 이전에 남과 북의 3년간의 초기 국가형성과 국민형성의 과정은 각각 좌파와 우파,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배제의 과정과 중첩되었다는 점에서 북한에서의 통합 역시, 우리가 이미 살펴본 남한에서처럼, 부정적 통합(negative integration)의 개념에 정확하게 접근한다. 그것은 각각의 체제와 이념이 지닌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장점에 대한 호소와 확산을 통한 국민형성, 국민통합(national integration)의 과정이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 상대체제와 이념에 대한 부정적이고 배척적인 선전과 각인을 통한 국민형성, 국민통합의 과정이기도 하였다. (pp. 612~613.)

6.
역사적으로 파시즘 이데올로기도 그 대중적 기반을 갖는다. 즉 역사적 경험에서 추출된 이념은 정치권력의 구축에 선행하며 정치적 행동의 초석을 놓아준다. 그렇다면 남한의 반공주의는 반드시 위로부터 주어진 측면만 존재했었던 것인가 우리는 묻게 된다. (p. 775.)

7. 반도 채 못 읽었던 것을 오늘 오전부터 손에서 놓지 못하고 이 시간까지 계속 읽었다. 뭔가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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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0 17:22 2009/01/20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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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주 이야기한 것처럼 나는 의도한 것이든 우연이든 출판 혹은 발매와 발맞춰 컨텐츠를 구매하는 일이 매우 적은데, 지난 11월에 나온 책을 벌써 후루룩 다 읽어버린 내 모습을 보자니, 이건 역시 오덕 본능.

2-1. 좀 짜증나는건 이런 책에 늘상 붙게 마련인 자화자찬 및 이런저런 구구한 찬사들. 일단 저 부제부터가 마음에 안 드는데 '음악으로 굴곡진 삶을 관통'했다니... 아니 뭐 틀린 얘기는 아닌데, 이게 그렇다고 '이것이 인생이다'나 '인간극장' 뭐 이런거 아니잖아?

2-2. 본인도 출간에 맞춰, 힘들어 하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고 싶어 썼다... 뭐 이렇게 인터뷰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에이... 횽아도 얼추 50 넘어서 술이랑 약물 끊으셨으면서... 게다가 마누라가 나랑 나이가 몇 살 차이 나더라... 물론 공개적으로 하기 힘든 얘기들을 많이 하신 것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긴 합니다요.

3. 물론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여성편력이라든지, 무대 뒤에서의 아티스트들의 약물복용이라든지 하는 내용들을 알게 된건 생각 외의 수확(이 아닐지도!). 그러고보면 약물했던 얘기를 자서전에 써놓은거 보면 미국이란 나라가 참 신기하기 부럽기도(?) 하다만은...

4. 우야던동 최근에 이렇게 아무런 부담감없이 편한 마음으로 독서해본적이 없어서 그 내용에 상관없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거웁게 책을 읽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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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1 22:03 2009/01/11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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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뿔도 모르기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지금보다 더 모르던 시절에 읽었던 책을 지금 시점에 다시 읽으면 그 때는 포착하지 못했던 걸 잡아내거나 잘못 독해했던 부분들을 교정하는 재미(랄까 씁쓸함이랄까)가 꽤나 쏠쏠한 편이다. 이 책을 처음 만난건 복학 후의 전공수업에서였는데, 아마 07년 1학기였던가 그랬을 것이다. 만만치 않은 두께에 난해한 직역투의 문장 등으로 인해 상당한 난이도로 다가왔던 책이었다. 어찌어찌 내가 필요한 극히 일부분만 발췌해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2. 내용은 크게 세 부분 정도로 나눠볼 수 있을 것 같다. 첫 다섯 장chapter은 내용을 풀어나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개념을 정리하고 있고, 그 이후 세계 각처에서 일어났던 포스트식민주의적 실천의 역사적 궤적 정리, 마지막으로 푸코와 데리다를 분석하고 있다. 물론 워낙 다양한 분야와 내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목차만 보고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서 읽어도 괜찮다.

3-1. 특징적인 점이라면 포스트식민주의를 반식민주의라는 맥락 속에서 일어난 마르크스주의의 지역적 변용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 이렇게 되면 당연히 마르크스주의 그 자체보다는 그것이 각자 발화되는 지역적 맥락이 중요해지는데, 그에 따라 등장하는 것이 바로 '트리컨티넨탈리즘'이라는 용어. '남반구'나 '제3세계'라는 식의 2분법적 혹은 네거티브한 명명이 아니라 각 식민지들의 고유한 경험을 되살려보자... 뭐 이런 문제의식인데 꽤나 신선하고 타당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3-2. 다만 문제는 트리컨티넨탈리즘을 마르크스주의의 지역적 변용으로 설명하려다 보니 뭔가 그 외연과 내포가 다소 아리까리해진다는 거. 책에서 아프리카 사회주의의 대표주자인 것처럼 설명하고 계신 은크루마나 니에레레 같은 애들은 좀 냉정하게 보면 독재자의 이미지도 강하거든. 그런 식으로 하면 김일성 수령님도 동아시아 트리컨티넨탈리즘의 대표주자냐, 응?

3-3. 이 부분은 대부분의 포스트식민주의가 식민주의의 정신적, 정치적 유산을 해체하기 위한 '탈식민주의'로 정의된다는 점과 결정적인 차이를 보인다는 거. 그 차이가 바로 위에서 말했던 외연과 내포의 아리까리함으로 나타나는데 요게 은근 논쟁적인 부분. 오히려 그래서 이 책이 한국의 포스트식민주의 연구에서 많이 인용되기도 한다만은...

4. 아, 하나 빼먹고 넘어갔는데 이 양반은 식민주의랑 제국주의를 구분해서 사용한다. 일본이라는 하나의 제국에 속했던 가장 주요하고 (한동안은 유일했던) 식민지였던 한국에서는 대개 무시되는 차이인데, 아마도 다양한 식민지를 거느렸던 제국 메트로폴리스의 심장부에 있는 저자와 식민지 경험을 가진 국가에 사는 우리의 위치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자세한 내용은 설명하기 귀찮으니 책 읽어보시고...

5-1. 또 하나 재미있는 부분이 후반부의 푸코의 담론 개념을 분석한 것. 릴라 간디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흔히들 에드워드 사이드의 이야기와 푸코의 담론 개념을 동일시하는데 로버트 영은 여기에 '아니거든요' 한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이 말하는 담론이 문제가 되는건 동양을 '재현'하는데 실패했다는 사실에 있는데, 저자에 따르면 푸코의 담론 개념은 이런 식의 '재현'의 문제, 즉 물질세계와 언어가 괴리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게 아니라는거. 오히려 푸코가 주목하는 것은 담론이란 물질세계를 규정짓고 인식하는 상호관계의 산물인 동시에,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는 방식 자체를 규정짓기도 한다는 것.

5-2. 따라서 여기서 더 나아가면 담론은 어떤 고정적이고 불변적인 인식(혹은 지식)체계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은 그렇지 않지?) 담론을 구성하는 각각의 언표들은 그것이 존재하는 맥락이나 기능, 상황 등에 영향을 받으면서 가변적으로 '말해지는' 것들이다. 따라서 언표는 언어적인 형태를 가지고는 있지만 엄밀히 말해서 언어와 세계 사이의 상호작용의 산물이라는 것. 그래서 그것들의 총합인 담론 역시 이질적이고 가변적이며 유동적이다.

5-3. 이렇게 되면 담론은 고정적인 것도, 극복불가능한 것도 아니게 된다. 그러한 가변성은 담론이 권력의 도구이자 결과인 동시에 그것을 균열낼 수 있는 시발점이 될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한쪽에 권력의 담론이 있고 맞은편에 그것과 정면으로 대립하는 또 다른 담론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담론은 세력 관계의 영역에서 작용하는 전술적 요소 또는 세력권이고, 따라서 같은 전략 내부에 서로 다르고 심지어 모순되기까지 하는 담론들이 있을 수 잇으며,(중략, 여기까지는 푸코 인용문) 푸꼬에게 권력은 의도적인 것도 아니고 완전하게 실현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권력은 "다양하고 유동적인 세력 관계의 영역, 여기서는 전반적이지만 결코 전적으로 안정된 것은 아닌 효과가 산출되는 영역"이다. (p. 716)

5-4. 물론 이와 같은 분석이 얼마나 타당한지는 나도 모른다. 그래도 나름 참고할만한 해석은 아닌가 싶다. 좀 더 공부를 해봐야지. 여기서 psychede님하가 뭔가 "캐병진들, 그건 이거야"하면서 특유의 냉소적 조언을 날려주지 않을까 기대도 해보지만은... 우야던동 이 시간까지 시간가는 줄 모르고 나름 꽤나 재미있게 읽었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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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03 00:08 2009/01/03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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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언제부터인지 잘 기억은 안 나는데, 꽤나 오래전부터 읽고 싶다고 마음을 먹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읽지 못하던 것을 (지인들에게 생일선물로 사달라고 졸랐음에도 불구하고!!!) 과학생회실에 굴러다니던 것을 거의 훔쳐오다시피 해서 들고와 후루룩 다 읽어버렸다. 그럴 일은 없겠으나, 혹시 이 책의 주인이 이 글을 보고 있다면 과학생회실에 되갖다놓을테니 가져가시길... (6장에만 형광펜으로 줄을 그어놓은 것으로 보아 6장만 읽으신 듯...)

2. 확실히 대중을 위해 쓰인 책이기 때문에, 나같은 역사전공자들 사이에서는 매우 당연하게 통용되는 사실들(사진, 영화, 만화 등이 묘사하는 역사적 사실들이 결코 객관적인 진실이 아니며 그 속에는 이미 작자의 주관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고 있고, 따라서 그에 대한 내 글도 굳이 그러한 내용을 요약할 필요는 없겠지.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학 전공자들이 이 책을 주목해야 할 이유가 퇴색되는 것은 아닌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책이 '미디어'에 주목하고 있다는 단 한 가지 사실. 사실 남한 역사학계에서 미디어에 대한 관심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데 실제로 압도다수의 대중이 미디어를 통해 역사적 지식을 습득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가히 '역사에 대한 학자들의 책임방기'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삽네다. 물론 남한 학계의 규모가 여전히 영세한 수준을 못 벗어나기 때문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지금부터라도 젊은 연구자님하들이 미디어 쪽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

  지금까지 역사가는 (중략) 사진 영상을 단지 텍스트에 첨가된 부속물이나 서술의 진실을 방증하고 정서에 호소하는 힘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과거 사진과 마주치는 일은 그 이상으로 강력한 힘을 지닌다. 문자로부터 뒷걸음질치고 있는 이 시대에 사진 영상을 과거와 관련을 맺는 계기로서 점점 더 중요해질지도 모른다. (pp. 162~163.)

4. 아침에 일어나면 아침뉴스, 출근하면서 버스 라디오, 길바닥에 포스터, 퇴근하고 나서 집에서 배깔고 엎드려 보는 만화책, 휴일이면 보러 가는 영화까지... 너는 이미 미디어의 포로.

  히틀러가 『나의 투쟁』에서 말했듯이 "대중의 기억 속에 생각이 스며들게 하려면 결국 끊임없는 반복만이 최종적인 성과를 올릴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 흑과 백으로 확실한 대비를 묘사하는 것이다." (p. 269.)

  비록 노골적인 조작이 이루어지는 상황이 아닐 때조차 미디어가 사람들의 과거 이해에 미치는 영향을 좋은 나쁘든 티가 안 나도 섬세하고 뿌리가 깊은 법이다. (p. 321.)

5-1. 뭐 어쨌든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인하야 바야흐로 너도나도 개나소나 컨텐츠 제작과 기록에 참여하는 시대가 열렸다. 싸이에 블로그에 또 뭐시기들에...

  신문이나 잡지, 전시회, 서적 등에서 사진이 대량 소비되는 현상은 어떤 의미에서 가족 앨범의 발달을 반영한다. 처음으로 발간된 사진집의 내용이 초기의 가족 앨범과 마찬가지로 공시적이었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나라, 어떤 제국, 또는 특정한 극적 사건에 대한 전체상을 꾸며내려고 다양한 사람과 각지각처의 동시대적인 영상을 모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전체상이야말로 한없이 복잡하고 공간적으로 분산된 리얼리티를 다루기 쉽고 눈에 보이는 형식으로 응축해내는 특별한 힘을 지니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사진집이 담보하는 분명한 신빙성 덕택이었다. 사진집을 들추면서 독자들은 자기가 속한 사회를 '보고 있다'는 감각을―비록 그것이 현실을 살아가는 실제적인 경험의 틀을 훌쩍 뛰어넘는 것임에도―느낄 수 있었다. (중략) 또한 대량소비와 매스미디어의 발달이 전체전('total war'의 번역인 듯 한데, '총력전'이 좀 더 익숙한 번역인 듯―Dog君)의 체험과 어우러져 공통의 기억을 산출했고, 그것이 연대기적으로 편집된 국민의 '집단 가족 앨범'을 출간하는 기반이 되었다. (pp. 140~143.)
  대개 사람들은 유저들이 만드는 컨텐츠에 대한 환상이 있는 것도 같은데, 가만 생각들 해보시라. 결국 모두 '익숙한 풍경'들 아닌가염.

5-2. 그러고보니 지금 내가 글을 쓰는 이것도... 아 제길... 결론이 뭐 이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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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28 19:42 2008/12/28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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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참으로 간만의 글이라는 점을 미리 알리면서... 그동안 내가 바쁘긴 바빴나보다. 근데 어째 해놓은건 하나도 없는걸까.

1-1. 역사를 전공하는 학생이고 아마도 큰 이변이 없는 한 이 길로 먹고 살 것 같은 내 상황상 새삼스럽게 이 자리에서 유럽중심주의가 왜 나쁜 것이고 그것이 왜 어처구니없는 것인지 주구장창 떠들 이유는 없어 보인다. 네이버 블로그에도 널리고 흘러넘치는 그런 지식을 재생산하는게 내 임무는 아니라고 믿거든.

1-2. 제목만 봐도 딱 느낌이 오는 것처럼, 이 책 역시 유럽중심주의에 관한 또 하나의 탁월한 비판서의 대열에 포함된다. 굳이 장점을 꼽자면 현재 서구학계에서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학자들의 글을 직접, 즉 대놓고 까는 글이라는 것. 비전공자들에게는 다소 까다롭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논쟁의 지점도 확실히 잡힌 편이고 그래서 비교적 술술 잘 읽히는 책이다. 그래서 굳이 책의 내용을 요약하는 것 대신 이 책에 대해 가할 수 있는 몇 가지 비판을 제기하는 것으로 서평을 대신하고자 하니, 일반적인 서구중심주의 비판 내용을 기대하신 분은 집에 가시고.

2-1. 먼저, 이 책에서 사용하고 있는 ‘유럽’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문제. 이 책에서 ‘유럽’ 개념은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중부 유럽과 앵글로 아메리카 등지를 일컫는 실정적인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지역들이 대부분의 경우 옥시덴트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사카이 나오키 센세-가 말씀하셨던 쌍형상화co-figuration의 도식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이게 무슨 소리냐면은 옥시덴트와 오리엔트라는게 고정적인 개념이 아니라, 언제나 두개가 동시에 배치되어 비교될 때만 성립이 된다는 거. 예를 들어 설명하면, 내가 사는 왕십리는 신촌이나 홍대에 비교하면 아무래도 이거... 완전 오리엔트다. 근데 어디 전기도 안 들어오고 버스도 잘 끊기는 그런 동네에 비하면 확실히 옥시덴트거든. 유럽도 마찬가지. 독일 같은 나라는 영국이나 프랑스와 비교될 때와 폴란드나 우크라이나와 비교될 때 그 의미가 달라진다.

2-2. 자, 그렇다면 '유럽=옥시덴트'라는 등식은 맥락에 따라 바뀔 수도 있다는거지. 자꾸 서구를 고정적인 개념으로만 판단할 경우 유럽 내부에서의 동/서 구분 짓기나 동아시아에서의 동/서 구분짓기가 포착되지 않는 맹점이 있거든. (이 얘기는 전에 썼던 '일본 동양학의 구조'를 참고하시면 이해가 빠르실거외다.)

3-1. 둘째는 분석 대상이 서구로만 한정되어 있다는 것. 비판 대상으로 삼는 텍스트가 서구에서 생산된 텍스트로만 한정되고 있으며, 그에 대한 논박도 非서구의 경험을 서술하는 것 대신 비서구도 그에 못지않은 발전을 이뤘다는 주장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에 결국 논의의 수준은 아시아가 서구의 발전양상과 얼마나 비슷한 수준을 이룩하고 있었느냐를 증명하는 것에서 머무르고 있다. 이렇게 되니까 보편적인 비교기준이 서구가 되고, 그래서 아시아의 역사는 아무리 잘나도 ‘서구에 비겨보아 무엇인가 결여된 역사’라는 틀을 넘어서지 못한다는거. 저자의 전공분야가 트리컨티넨탈에 대한 지리학적 연구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더욱 더 아쉽게 다가온다.

3-2. 이 점에서 글로벌 히스토리 분야에게 제기하고 있는 ‘상호비교reciprocal comparison’라는 분석방식은 상당히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상호비교의 방식은, 케네스 포메란츠에 따르면 어느 한 편을 보편적 기준norm으로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각 비교대상이 가진 ‘편차deviation’를 통해 양측을 동등비교하자는 것인데, 이러한 방법이 어느 정도 해결책을 제시하는 단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요. 위에서도 설명했던 쌍형상화의 도식을 염두에 둔다면 결국 서구중심주의라는 인식구조는 옥시덴트와 오리엔트의 경험을 동등하게 분석할 때에만 극복이 가능할 것이여.

4. 셋째로 기왕지사 논의의 대상을 서구의 텍스트로 한정하려 했다면 앗싸리 그것이 역사적으로 형성되는 과정이나 그것이 변호하고 싶은 가치는 무엇인지, 그 속에 내재된 지향은 무엇인지에 논의의 무게중심을 좀 더 싣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그거 때문에 이 책은 통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대안도출에 있어서는 상당히 무기력한 모습을 노출하고 있다. 서구중심주의를 푸코적 의미의 '담론discourse'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서구중심주의적 텍스트를 정태적이 아닌 고고학적으로, 즉 그러한 논리들이 만들어져 온 과정과 그 속에 녹아있는 권력의 의지를 탐색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는게 내 생각. (물론 그거 죵니 어렵다. 푸코 개새끼!) 그래서 내 결론은... 서구중심주의의, 서구로부터의 해체는 바로 이 지점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거.

5-1. 마지막으로 얘기하고 싶은 건 블로트가 보이는 환경결정론에 대한 지극한 거부감. 특히 '총, 균, 쇠'에 대한 비판에서 절정에 달하는 이러한 냉소적인 태도는 그의 글 속에서만 한정해서라면 서구중심주의에 도전하는 매우 타당한 자세가 될지도 모르지만, 다른 맥락에서는 양날의 칼이 될 가능성이 있다. 최근에 쏟아지고 있는 많은 (서구중심주의 패러다임에 도전하는) 글로벌 히스토리의 성과물들이 환경결정론에 대해 부채를 지고 있음을 생각하면 이러한 우려는 더욱 더 커질 수 밖에 없다. 물론 현재의 '저발전'이 환경적 요인의 결과가 아닌 '인간의 행위 혹은 역사'의 결과라는 블로트의 지적은 타당하다. 하지만 그가 말하고 있는 '인간의 행위 혹은 역사'라는 것이 결국은 서구의 근대제국주의가 빚어낸 결과들에만 국한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 같은 지적은 반서구중심주의의 논의를 결국 진부한 (근대)민족사national history의 틀로 회귀시킬 위험성을 품고 있다.

5-2. 현재 나타나는 모든 현상이 결국 근대민족국가의 결과로만 규정되기 때문이다. 프라센짓 두아라는 '민족으로부터 역사를 구출하기'에서 민족사의 틀이 다양하게 산포dispersal된 소문자 역사들histories의 경험을, ‘보편성’이라는 이름의 전달transmission된 대문자 역사History로 전유하는 과정을 그려낸 바 있다. 다양한 역사를 민족사의 틀로 형질전환시키는 것이 결국 서구적 보편성으로의 통합을 의미했다는 두아라의 지적을 상기시켜 본다면 블로트의 환경결정론 비판은 좀 더 엄밀하게 재고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6-1. 전문번역가의 번역답게 문장은 말끔한데, 영 말도 안 되는 번역이 종종 눈에 띈다. '총, 균, 쇠'를 '총기, 병균, 강철'이라고 번역한 것이라든지, decolonize에 과거청산의 의미를 강하게 넣어서 번역한 것이라든지... 특히 후자의 경우는 의역에 대해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는 전공자들로서는 다소 까리한 부분.

6-2. 지난 번에 썼던 '조선/한국의 내셔널리즘과 소국의식'처럼 이 녀석도 발표문으로 썼던 것을 대충 수정했다는 사실을 자백하면서... 어차피 뭐... 수업시간에 읽으려고 쓰는 글이나 블로그에 후려갈기는 글이나 개발새발인건 마찬가진걸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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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24 16:55 2008/12/24 16: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