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729

from 잡繡나부랭이 2009/08/03 21:40

[Dog君, 2009.]


1. 이 정도면 거의 다 한거지 안 그런가.

2. 전에도 말했지만 가을까지 끝내고 싶은 내 마음. 하지만 논문.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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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03 21:40 2009/08/03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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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715

from 잡繡나부랭이 2009/07/15 11:03

[Dog君, 2009.]

[Dog君, 2009.]


1. 생애 첫 풍경도안이 드디어 지난달 말에 끝났으나 만성적인 재정적자로 인하야 액자에 넣는건 일단 보류. 이거 뭐 돈이 있어야 면장을 할 거 아니야.

2. 다시 풍경도안 하는 일은 가급적 지양하기로 마음먹고 다음 도안은 다시 캐릭터 도안으로. 캐릭터 도안이라는게 기본적인 구도는 천편일률적이라 이 정도만 해놔도 대충 모양새는 보인다. (벌써!) 아이다 뒤를 가로지르는 실들이 보이는데 이걸로 내 십자수 습관이 드러난다. 난 가위질이 너무 귀찮다. 캬악.

3. 적어도 가을 정도까지는 마무리해야 할 명백한 이유가 있는 관계로다가 매일매일 조금씩이라도 해둬야겠다고 생각하는 중. 때맞춰 게임도 끊었겠다 아침저녁으로 조금씩 하면 되지 않겠나. 구월까지 끝내는걸 목표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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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15 11:03 2009/07/15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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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글을 읽으며 내내 추측하던 것인데 한켠의 무대가 되는 C시는 역시 내 고향이 맞았다. 내내 익숙하던 지명에 익숙한 풍경들을 이입하며 글을 읽는 재미도 나름 쏠쏠했다.

0-2. 제목에는 출판한 햇수만 쓰고 출판사를 쓰지 않았는데 내가 읽은 것은 2006년에 나온 이병주 전집의 것이었기 때문.

1. 이런저런 이야기들과 감상들이 있지만 거개가 지난 메모에 써둔 것과 별 다르지 않거니와 쓸데없이 소설의 내용을 털어놓는 것도 장래의 독자들에게 그닥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아 진부한 감성을 늘어놓는 짓은 생략하고 싶다만은.

2. 결국 '관부연락선'의 주제의식 양 극단의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에서 먹물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정도로 수렴된다. 어쩌면 이병주는 이 소설을 통해 이념이 과잉하던 시대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것일 수도 있고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좌익과 우익이 각자 떠들어대는 것처럼 특정한 이데올로기의 배타적이고 압도적인 승리로 성립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러한 체념들이 모이고 모여 만들어진 그런 어떤 것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3. 세상은 아직도 극단적이고 이념은 다시 과잉상황으로 돌아가는 듯 하다. 나는 어디에 서있어야 할까. 유태림인가 강달호인가 이광열인가 아니면 이선생인가. 한가지 확실한 것은 E처럼 팔짱끼고 멀리서 모른 척 바라볼 수 있는 처지는 아니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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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13 22:55 2009/07/13 22:55
0. 나름 평균 이상의 독서량을 자부하는 편이지만 양에 비해 독서의 폭은 매우 협소한 편이다. 어지간해서는 안 읽는 책이라면 대개는 자연과학 관련서적이나 소설류인데, 자연과학은 일단 읽어도 모르니까 안 읽는다지만(가장 최근에 읽은 것이 얼추 2년 반쯤 전에 읽었던 상대성이론 관련 책자) 소설을 안 읽는다는건 내가 생각해도 퍽이나 우스운 일이다. 게다가 문학이라 하면 모름지기 역사학도라면 철학과 함께 반드시 일정 수준의 교양을 쌓아둘 필요가 있는 영역이 아닌가! 어쨌든... 동학들과의 세미나 모임이 아니고서야 이 책을 읽을 일도 아마 없지 않았을까.

1-1.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은 부산釜山과 시모노세키下關를 잇는 배편이다. 관부연락선이라는 공간은 다양한 이유와 욕망, 갈등이 교차되는 공간이다. 푼돈이라도 벌어보려 일본으로 건너가는 한국인 노동자들이 3등칸을 가득 채우고 있지만 일본 본토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민족적 멸시와 가혹한 노동이다. 반면 일본 본토에서 조선으로 건너가는 사람들은 중일전쟁에 참전하기 위한 병사들로 그들은 아마 전선戰線 어딘가에 배속되어 전장의 소모품으로 전락할 것이다. 관부연락선은 조선과 일본을 이어주고 사람들에게 새로운 환경을 열어주는 매개로 기능하지만 그 새로운 환경이 희망의 신세계는 아니다. 양측 모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암울한 미래 뿐.

1-2. 이렇듯 관부關釜의 양측 모두 참담한 미래 뿐이지만 그것이 민족 간의 차별의 무화無化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유태림은 3등칸을 이용할 때 조선인으로서 느껴야할 모멸감과 물리적 불편함 때문에 애써 2등칸에 타려하지만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본인 친구 E는 말도 안 되는 감상(요즘은 이런걸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단어로 설명하더군)으로 3등칸을 고집한다. 부산에 내린 E는 처음 보는 부산의 정경에 감탄사를 연발하지만 그것은 결국 제국 지식인의 변방에 대한 호기심 이상은 아니다. 하지만 유태림은 그런 부산의 풍경이 부끄러울 뿐이다. 조선과 일본으로 양분된 세계는 비록 관부연락선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양측의 간극은 크기만 하다.

1-3. 꽤나 넉넉한 살림에 관부연락선 2등칸을 누리며 조선인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물리적 불편함을 능히 피할 수 있으며 일본인 친구들과도 격의없는 사이인 유태림은 그런 의미에서 양분된 세계의 중간 어디쯤에 걸쳐있다. 관부연락선은 유태림이 위치하고 있는 바로 그 지점을 지칭하는 지명일지도 모른다.

2-1. 해방되고 세상은 다시 둘로 갈린다. 좌익과 우익이라는 양 극단 속에서 중간지대는 없으며 민족 어쩌구 하는 소리는 낭만주의로 치부된다. 조금이라도 배운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이 양 극단 어딘가에 스스로를 위치시켜야 한다.

2-2. 유태림의 위치는 이번에도 중간 어디쯤이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좌익 교사와 학생들과의 신경전은 얼핏 그의 이념적 위치가 오른쪽 어디쯤이 아닌가 의심을 하게도 만들지만 정확히 말해서 그는 이도 저도 아닌 중간 어디쯤이다. 좀 배운 처지이기는 하지만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에서 그 역시도 "판단이 정확하게 서지 않"기 때문이다. 유태림은 고급부 2학년 학생들과 함께 비어있는 교단에 (상상 속에서) 이승만을 세워보기도 하고 김구나 박헌영을 세워보기도 하지만 누구든 마뜩찮기는 마찬가지다. 이러한 유태림의 자세를 '우유부단'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은 다소 부당해보인다. 정확히 둘로 쪼개질 수 없는 세상을 억지로 둘로 쪼개놓고 어느 하나를 고르라고 강요하는 상황 자체가 부조리한 것 아닐까.

2-3. 선택지가 둘 밖에 없는 문제 앞에서 고민하는 사람의 비극은 그나마의 확신도 없다는 것이다. 어디에 대충 '정답없음' 같은 선택지가 있으면 좋으련만 그것마저 없으니 고민만 하게 되고 결국엔 이도 저도 못하고 50%의 확률도 못 잡고 만다. 유태림이 도망치듯 학도병으로 지원한 것은 친일에 목적이 있었다기보다는 물리적 가혹함을 통해 정신적 갈등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선택은 아니었을까.

3. 소설이라는 글의 형태가 글쓴이의 주장과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아마도 작가인 이병주는 유태림을 통해 자기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싶은 거라 미뤄볼 수 있겠다. (실제로 유태림과 이병주의 삶은 유사한 측면이 많다.) 계급적으로든 민족적으로든 명확하게 한 쪽 극단으로 기울어지지 않은 유태림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역량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의 최대한 합리성을 유지하는 것 뿐이다. 학도병 부대 내에서의 공산주의 서클을 준비하는 것에 협조하지 않은 것은 그 대의에 동의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것이 초래할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싶지 않아서였고 학교에서 좌익 교사들과 학생들과 대립한 것 역시 명확한 정치적 신념이 아니라 학교라는 공간이 지녀야 할 어떤 당위성을 지키기 위함에 가깝다. 좌익활동가로 변신한 서경애를 바라보는 유태림의 감정에는 '미안함'이라는 것이 충만하고 있는데 이 역시 이념에 대한 동조라기보다는 휴머니즘적 시선에 가깝다. 유태림은 어떤 식으로든 이념으로 편가르기하는 상황을 피하고 싶어한다.

4. 대부분의 경우 세상은 둘로 나뉜다. 정확하게 말하면 둘로 나뉜다기보다는 우리가 세상을 둘로 나누는 것에 익숙한 것이다. 실제로 두터운 중간지대가 존재할 수 있지만 그 점은 대개 무시된다. 그리고 둘로만 나뉜 세상은 쉬이 극단화된다. 이 틈바구니에서 결국 죽어나는 건 그러한 상황을 좀체 받아들이지 못하는 '먹물'들이다. 어쩌면 유태림은 극단의 시대를 살아왔던 이병주의 '자기 변명'인 동시에 극단의 시대에 대한 이병주 나름의 통분의 아이콘일런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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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12 00:02 2009/07/12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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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살아가면서 필요한 여러가지 능력 중에 '통찰력'이라는게 있는데 이게 유독 내게 부족해서 난감한 경우가 많다. 쉽게 말해서 어떤 사물 혹은 사건을 관찰하는데 있어서 단숨에 전체 그림을 그려내지를 못한다... 뭐 대충 이런건데 그런 탓에 내 기억 속에 무의미하게 흩어져있는 수많은 편린들이 어떤 계기로 인해서 하나로 조합되기 전까지 큰 그림을 제대로 그리지 못한다. (이 때문에 공부의 길을 걷는데 있어서 애로사항이 꽃핀다. 아오.)

0-2. 하지만 그 반대급부도 있는데 그런 식으로 산포된 작은 조각들이 하나의 논리회로 속에 재배치되는 순간은 매우 즐거운 순간이라는 것. 최규석을 알게 된 것도 얼추 그런 과정이라고 하겠다.

1-1. 몇 년 전에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를 처음 보고 꽤나 충격을 받았었다. 뽀송뽀송한 동화를 냉정한 현실 속에 녹여냈을 때 그것이 얼마나 그로테스크해질 수 있는지를 깨달은 덕분이었다.

1-2. 한겨레에 연재되었던 '습지생태보고서'를 보고 '뭐 이런 쌈마이색기들이 다 있어...' 했던 기억이 난다. 어딘지 모르게 리얼맞은 궁상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연신 사각 컷 속의 이죽거리는 그 웃음들을 보며 은근한 일치감 및 위화감을 느꼈다. 하지만 사실... 그다지 와닿는 만화는 아니었다.

1-3. 제발로 영화를 보러 가는 일이 가히 연례행사 수준인 나도 가끔 미친 척하고 혼자 극장을 찾는 경우가 있다. 그날은 아마 '필승 연영석'을 보러 갔던 것 같은데 영화 시작 전에 새로 개봉하는 옴니버스 애니메이션 예고편이 나왔다. '사랑은 단백질'. 나오는 인물들이 '습지생태보고서'와 같다는 생각은 못했고 그저 상상력이 굉장하다는 생각만 했다. 배를 뜯기고 애처롭게 청테이프로 제 배를 붙이던 저금통 돼지의 식은 땀을 보면서.

1-4. 아마도 무슨 자료를 찾는 중이었을거다. 80년대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어느 사이트에서 문득 찾게 된 만화, '100℃'. 독자의 직접적인 감정에 호소한다는 점에서 강풀과 유사했지만 화법의 직접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오히려 강풀보다 더한 화법을 택하고 있었다. 혹자는 이 세련된 시대에 이렇게나 투박하고 무식한 내지름을 보면 구시대적인 화법이라 냉소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의 화법이야말로 가장 의미있는 화법 중 하나 아니던가. 먹먹한 가슴과 액체가 그렁그렁한 눈시울로 작가 이름을 찾아보았다.

1-5. 최규석이라는 이름으로 위의 모든 작품들이 하나의 회로 속에 위치하게 되었다.

2. 가난했던 가정환경과 찌질했던 과거에 대한 추억 하나쯤 안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없는 사람도 당연히 있다.) 지금이야 살림이 많이 여유로워졌지만 우리 집의 과거도 평균 이하의 경제능력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작은 도시 근교의 농촌에서 살았던 나 역시도 콧물 빨아가며 삘기랑 산딸기 뜯어먹어가며 자란 기억이 있다.

3-1. 한국현대사의 비극은 우리의 삶을 그저 가감없이 드러내기만 해도 이미 그것만으로 폭력과 독재, 수탈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게 된다는 점이다. 해방 이후의 한국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근대권력의 모순 속에 스스로를 위치시키는 일이었고 따라서 우리들이 살아왔던 바로 그 궤적이 근대권력의 모순이 발현되는 그 지점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일은 이미 그 자체로 현실을 고발하는 성격을 지니게 될 수 밖에 없다. 대한민국 원주민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면 그 이유는 아마 거기에 있을 것이다.

3-2. 하지만 이 책의 미덕은 그 정도에서 끝나지 않는다. 아니 그 정도에서 끝났다면 흔한 대자보 만화와 다르지 않았겠지. 쓸데없는 감상과 치장을 넣지 않았기에 궁상맞지도 않다는 것. 아마 그것이 이 책의 또 하나의 미덕이리라.

4-1. 꼭 내 얘기하는 것 같아서 깜딱 놀랬던 페이지 하나. 좀 길어도 여기에 다 쓸란다.

  (전략) 내 마음 깊숙한 곳에는, 도시에서 태어나 유치원이나 피아노학원을 다녔고 초등학교 때 소풍을 엄마와 함께 가봤거나 생일파티라는 걸 해본 사람들에 대한 피해의식, 분노, 경멸, 조소 등이 한데 뭉쳐진 자그마한 덩어리가 있다. 부모님이 종종 결혼을 재촉하는 요즘 이전에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어쩌면 존재하게 될지도 모를 내 자식을 상상하게 된다.

  상상하다보니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 아이의 부모는 모두 대졸 이상의 학력을 가졌을 가능성이 크고 어버지는 화려하거나 부유하지는 않아도 가끔 신문에 얼굴을 들이밀기도 하는 나름 예술가요 (중략) 집에는 책도 있고 차도 있고 저만을 위한 방도 있으리라. 그리고 아버지는 어머니를 때리지도 않을 것이고 고함을 치지도 술에 절어 살지도 않을 것이고 피를 묻히고 돌아오는 일도 없어서 아이는 아버지의 귀가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리라.

  그 아이의 환경이 부러운 것도 아니요, 고통 없는 인생이 없다는 것을 몰라서 하는 소리도 아니다. 다만 그 아이가 제 환경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제 것으로 여기는, 그것이 세상의 원래 모습이라 생각하는, 타인의 물리적 비참함에 눈물을 흘릴 줄은 알아도 제 몸으로 느껴보지는 못한 해맑은 눈으로 지어 보일 그 웃음을 온전히 마주볼 자신이 없다는 얘기다.


4-2. 그리고 만화도 한 토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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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5 10:38 2009/07/05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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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솔직히 말하자면 좀 불편하다. 앞에 쓴 '러시아 혁명과 레닌의 사상'도 그렇고 이것도 마찬가진데, 이처럼 근본적이고 강퍅한 이야기를 던지는 책이 나는 솔직히 좀 불편하다. 당장 내가 원칙주의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가 한 때 상당한 수준의 원칙주의자였음을 상기한다면 이런 마음의 무거움은 더해진다. 거기다 며칠 전 어떤 술자리에서 한 선배에게 "그건 너무 근본주의적이에요."라고 대들었던 것까지 생각하면야.

1-2. 최근에 잠시 김규항을 멀리 했었다. 몇 가지 일들이 누적되어서인데 김규항이 일반적인 안건들에서 보여주는 올바른 자세들이 어떤 특정한 사안들에 대해서는 전혀 발휘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음을 발견해서였다. 하지만 최근에 그러한 이유만으로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것은 생각 외로 편협한 짓임을 깨달았다.

2. '종교'라는 키워드 역시 내가 오랫동안 고민하고 있는 주제 중 하나인지라 이런 식의 글을 보면 내심 많이 반갑다. 꽤 여러 해 전부터 인간에 대한 존중과 사랑을 폐기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종교 하나쯤 가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고민을 계속하고 있기도 하고 말이지.

3-1. 김규항이 이 책 내내 천착하고 있는 것은 당대의 맥락에서 예수를 바라보는 일이다. 현재의 사람들은 성경에 기록된 예수의 기적들을 두고서 그것이 진실이냐 아니냐는 식의 아둔한 논쟁에 빠져있지만 김규항은 복음서가 지어지던 당대의 맥락과 예수가 가지고 있던 사상의 일관성에 근거하여 성경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 기존의 예수가 가지고 있던 이미지가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반말이나 찍찍 뱉으면서 세상에 체념하고 마음수양이나 할 것을 설파했던, 지금 우리가 매일 TV에서 만나는 정치인 혹은 흔한 종교인들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면 김규항이 이야기하는 예수는 사회적 소수자들에게도 동등한 사회적 지위를 복원시켜주고 사회적 불의에 눈감지 않으면서도 매일매일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다.

3-2.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기성 사회와 불협화음을 일으키지 않은 종교란 없었다. 예수는 권력화된 유대교와 로마의 압제에 항거했고 불교는 카스트제도의 몰인간성과 맞섰으며 이슬람교 역시 기존의 권력과 끊임없이 마찰했다. 하지만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종교는 이미 그 자체가 권력이 되어있거나 혹은 권력과 불화하지 말 것을 설파한다. 우리는 예수와 석가모니의 삶과 고민을 얼마나 이어받고 있을까.

3-3. 박완서의 글이었을거다 아마. 새로 태어난 아이에게 많은 사람들이 축복의 말을 건네면서 누구처럼 되어라 어떻게 되어라하고 덕담들을 건네지만 예수님처럼 살거라라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예수처럼 산다는 것이 돈과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이상을 말함을 모두 다 알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4. 신앙의 힘이란 무엇일까. 종교의 미덕이란 무엇일까. 고민이 오늘 조금 더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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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4 17:19 2009/07/04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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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잘 따져보면 자연계와 인간계(물론 이 두 가지가 딱 잘라 구분되는 건 아니지만)는 참 닮은 구석이 많다. 특히 '변화'라는 측면에서는 더 그렇다. 자연계의 변화를 연구하는 것이 아마도 진화론일텐데 이 진화론에서 진화를 설명할 때는 점진적 변화가 누적되는 것이라기보다는 돌연변이나 어떤 특정한 사건을 통해 급진적인 변화가 단번에 일어난다고 이야기한다. (부디 맞길. 난 자연과학과 안 친하거든.)

1-2. 아마도 인간계에서는 '혁명'이 그러한 사건에 속할거다. 가장 짧은 시간 내에 가장 많은 것들이 변화하는 일련의 사건의 덩어리들. 우리가 혁명이라고 부르는 역사적 사건이란 대개 이런 것들이다. '혁명'이라 하면 얼핏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몇 가지 사건들이 있지만 역시 '혁명'이라고 할 때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지고 동시에 가장 많은 오해를 받고 있는 것은 단연 러시아혁명이다.

2-1. 러시아 혁명의 비극의 씨앗은 그것의 무대가 러시아였다는 사실에 있었다. 애초의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에 의한다면 사회주의 혁명은 러시아가 아니라 서유럽 국가에서 일어났어야 했다. 미성숙한 부르주아 계급과 노동자 계급, 여전히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농민 계급, 일천한 민주주의적 경험 등은 애초부터 러시아 혁명을 제약하는 조건들이었다. 사회주의의 터전이 마련되지 못한 곳에서 사회주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이 뭔가 와꾸가 영 안 맞는 상황.

2-2. 물론 이 점은 러시아의 사회주의자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러시아 혁명의 운명이 러시아에 있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영국이나 프랑스와 같은 서유럽 국가에서 동시다발적인 사회주의 혁명이 발생하지 않으면 낙후된 러시아의 사회주의도 얼마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를 어쩐담. 서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은 하나같이 캐발렸다는 거. 거기다 혁명 이후 발발한 백군白軍과의 내전, 세계대전의 여파 등을 거치면서 혁명의 중추를 담당했던 노동계급도 점차 힘을 잃어갔다. 그렇다. 가만 있어도 입에서 욕이 나오는 존니 난감한 상황.

2-3. 힘을 잃은 혁명의 속에서 반反혁명의 기운이 움트는 것은 어쩌면 당연지사일지도 모르겠다. 민주적 기반이 붕괴됨과 발맞춰 스탈린이 급부상했다. 뭐 여기부터는 모두들 잘 알고 있는 바와 같다. 그 이후 전세계의 사회주의 혁명은 스탈린의 지도 아래 두 가지 중 하나의 결과를 맞이했다. 캐발리거나 위성국가가 되거나.

3.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이제 얼추 100년이 다 되어가는 이 시점에 볼셰비키의 원칙을 되살리는 일은 사실 아무리 봉실봉실한 언어를 사용한다해도 다소간의 불편함을 동반하는 일이다. 게다가 요즘과 같은 포스트 뭐시깽이의 시대에 계급이니 노동이니 투쟁이니 하는 소리는 아무래도 얼추 한 20년 쯤 전의 화석언어 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강퍅한 원칙주의에 좀 더 공감해야 할 의무가 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거의 모든 권리는 그 강퍅한 원칙주의적 혁명이 달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4. 혁명은 많은 변화를 수반하는 동시에 가장 많은 가능성을 열어놓는 시기이기도 하다. 모종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혁명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상가집에서 옛친구들 만난 자리에서 술 몇 잔 마시고 혁명이니 쟁가니 부르는 짓거리들은 이제 좀 그만두자. 쪽팔리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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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4 16:28 2009/07/04 16:28
http://www.time.com/time/coversearch

  스크롤을 조금만 내려보면 자기가 태어난 날짜의 타임지 표지를 찾을 수 있는 기능이 있다.
시간이 드는 것도 아니어서 나도 한번 해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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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클랜드 전쟁 때였구나.

내용까지 읽어보기엔 좀 귀찮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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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9 09:49 2009/06/29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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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내의 허다한 뮤지션들 가운데 이상은만큼이나 많은 수식어구를 보유한 뮤지션도 드물다. 허다한 수식어구들이야 인터넷 어디에 가도 널리고 널렸으니 굳이 여기에서까지 쓸 필요가 있나. 그런건 좀 넘어가자.

2-1. 고1때였다. Rage against the Machine의 Killing in the Name을 처음 들었다. 충격은 두 가지였다. 디스토션 사운드의 강렬함과 내가 모르는 어떤 거대한 미지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 뻥 좀 많이 섞어서 말하자면 내 인생은 이 충격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2-2. 그 때 처음으로 내 돈내고 CD를 샀다. 처음 산 것은 Sad Legend의 앨범이었고 (술을 많이 마셨던 그 언제의 답사 때 이 CD는 사라졌다.) 두번째가 이상은의 공무도하가. 말은 좀 어눌했고 머릿결이 과히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치렁치렁하게 기른 머리를 가지고 있던 학교 앞 음반가게 아저씨는 반품되서 폐기 직전인 녀석을 힘들게 구한 거라고 생색을 무던히도 내더라.

3-1. 나의 음악에 대한 감각이란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참 몽매한 수준이라 한 앨범을 수십번씩 들어야 그 앨범의 진가를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다르게 말하면 수십번 듣지 않으면 그 앨범의 가치를 알지 못한다는 뜻인데 가지고 있는 CD가 몇 안 되었던 고등학생 시절에는 이 CD만 수십번은 듣지 않았을까. 꼼꼼한 성격도 못 되는 탓에 CD에 잔기스도 많이 갔는데 가끔 뒤를 들춰보면 이게 과연 재생이 가능하긴 한걸까 싶을 정도. 뭐 요즘이야 MP3로 리핑해놓고 들어서 더 이상 손상이 갈 일은 없겠다.

3-2. 아 맞다. 전에 언젠가 갔던 이상은 콘서트에서 사인을 받은 CD가 바로 요놈이었다. 귀여운 캐릭터까지 그려주면서 사인을 해줘서 기쁨이 매우 컸지. 낄낄.

3-3. 이게 초판으로 나온 것들 중에서도 가사집이 있는게 있고 없는게 있었다. 마지막 수록곡인 '무엇으로 다시 태어나든'은 가사가 없는 연주곡이었는데 가사집에는 가사가 버젓이 들어있었다 이거지. 누구 하나 먼저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가사집이 있는 앨범을 샀다면 누구나 가사집의 가사를 제 나름대로 연주곡에 맞춰 흥얼거린 기억은 있을 듯. (이 노래는 나중에 9집에 'Reincarnation'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실린다. 물론 보컬 포함이다.)

4. 감상포인트는 역시 '긴장감'. 대략 내 보기에 3집 정도부터 7집 정도까지를 지배하고 있는 뭐랄까... 구도求道 혹은 갈구渴求 비슷한 어떤 느낌이 있는데 그게 여기서 대충 절정에 달했다고 보면 된다. 이 앨범은 그냥 귀에 꽂고 대충대충 들을 수가 없다고나 할까. 마치 어려운 역사이론서 한권을 정독한다는 느낌으로 한음한음 한트랙한트랙을 청각을 최대한 집중하고 들어야 된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온 정신을 몰두해서 전체를 다 듣고 나서 CD를 다시 꺼낼 때 어떤 안도감(혹은 그 비슷한 것)이 느껴진다. 이 앨범은 그게 짱이다.

5. 잠시 딴 소리. 윤상은 이 앨범을 듣고 짧게 탄식했다. "우리 나라의 모든 남자가수들은 반성해야 한다."

6. 근데 역시 누가 뭐래도 September Rain Song가 짱. 이건 그 누가 뭐라해도 안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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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6 14:14 2009/06/16 14:14


존나 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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