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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래 제목은 'Japan's Orient'. 눈치가 빠르고 역사 쪽에서 나름 깜냥이 있는 사람이라면 원래 제목만 보고도 대충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건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원래 제목이 좀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는 점도.

2-1. 19세기 중엽(혹은 말엽), 서구의 근대성modernity와 조우한 동아시아에게 있어서 가장 필요했던 것 중 하나는 스스로를 근대로 포장시키는 것이었다. 앙드레 슈미드의 '제국 그 사이의 한국'이 조선의 신문에서 그러한 노력을 더듬어 본 것이라면 스테판 다나카의 '일본 동양학의 구조'는 일본의 역사학에서 그러한 노력을 찾아본 것이라고 하겠다.

2-2. 좀 더 정확하게는, 앙드레 슈미드의 글이 민족건설nation-building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스테판 다나카의 글은 역사담론 속에서 일본이라는 국가의 위치를 재정립되는 과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할 수 있다.

3. 어차피 근대가 민족(혹은 국민)nation과 국가state를 구성해가는 시기였다는 사실은 역사학에서라면 서당개도 다 아는 사실이기 때문에 그런 진부한 소리를 읊는 것은 전공자로서의 위상을 서당개의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일이라 하겠다. 따라서 그런 얘기는 일단 패스.

4-1. 다만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동아시아에서의 근대담론의 형성이 서구라는 타자를 염두에 두고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즉, 근대 담론의 목표가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타자'까지 포함한다는 뜻인데 이런 점에서 동아시아 근대담론의 지향orient은 반드시 복층적으로 분석될 필요가 있다. (물론 내가 여기서 복층적으로 분석하겠다는 뜻은 아니고...)

4-2. 따라서 일본의 근대담론도 서구라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먼저 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일본의 동양학 연구-인용자 주)을 통해 아시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일본인의 아시아사 연구는 일본에 대한 유럽인들의 오해를 바로잡아줄 것이다. 그는 말한다. "나는 일본인들에게 긴급한 문제는 저들 (서양) 국가에 일본을 알리고 일본의 진보를 분명히 하는데 (어떻게) 역사 연구를 이용할 것인가 하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역사적 사실과 이러한 진보의 수준을 이용하게 될 때, 그들의 경멸에 찬 표현은 분명 사라질 것이다." (pp. 90~91.)

5. 일본 근대 동양사학의 첫 목표는 당연히 '지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일본의 역사에서 가장 큰 역사적 결정력을 누려온 아시아 국가가 다름아닌 중국이었기 때문이다. 동양사학의 목표는 '지나'와 일본이 지니고 있는 아시아적 공통점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뒤떨어진 중국을 진보적인 일본과 분리할 것인가로 설정되었다. 그리고 일련의 노력들을 통해 지나와 일본이 공유하고 있는 문화적 틀, 즉 유교를 중국과 분리하는데 성공하는 것으로 동양사학의 1차적 목표는 달성되었다. 지나가 가지고 있던 동아시아 사회의 주도권을 일본으로 옮겨올 수 있는 이론적 장애물이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6. 이러한 과정을 통해 당대의 동아시아 지식인들을 매료시킨 하나의 이론틀이 완성된다. 이는 일본을 맹주로 하여 동아시아를 하나의 틀로 묶으려는 시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과 일본을 분리하려는 시도가 아시아라는 권역을 파괴하는 결과로 이어져서는 안 되었다. 그리고 이는 근대 아시아사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예를 들어 '동양평화론'이라든지...) 물론 이러한 틀이 제국주의적 속살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한 이집트주의의 헤게모니는 레나토 로살도Renato Rosaldo가 제국주의적 향수라고 부른 것에 의해 가려진다. 제국주의자는 종종 이해와 도움을 주기 위하여 식민지에 간다. 많은 경우, 과거-그의 근대적 세계가 상실한 것-에 대한 향수는 식민지 사회를 돕고자 하는 목적과 공존한다. 그러한 향수는 관찰자에게 대상을 동정하도록 유도한다. 그와 함께, 대개는 그 사회에서 그가 동경하는 바로 그 부분들을 변화시키는 데도 일익을 담당한다. '동양'에는 지나간 이상형에 대한 존경과 현재의 장소에 대한 우월성의 확신이 공존하였다. (p. 288.)
  그러한 내러티브의 결과는 분명하다. 토대인 역사철학이 수립된 이상, 객관적 연구는 현재의 상황들을 공인하는데 사용하고 조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인은 이제 그들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역사적 지식을 조작했으며, 푸코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그들 자신의 '이집트주의'를 강요할 수 있었다. (p. 309.)
  정치적, 지역적 연합은 중국에게 좀 더 큰 발언권을 부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일본의 체제 안에서의 발언권이었을 뿐 자립적인 것이 아니었다. 나이토처럼 스스로를 중국의 벗으로 간주한 사람들,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한 마르크스주의자들조차 이러한 구조에 포함되었다. (중략) 그들의 자신들의 범주 밖에 있는 중국인들의 목소리를 보거나 듣지 않았으며, '지나'가 그 올바른 행로에서 이탈하는 것을 허락하려고 하지 않았다. (p. 371.)

7. 사실 여기까지만 쓰고 말았으면 (요즘 범람하고 있는, 그래서 무지무지하게 흔해 빠진) 근대성 비판서와 아무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이렇게 길게 글을 쓸 욕구를 전혀 느끼지 못했을 것이고.) 하지만 저자는 그러한 근대담론 속에 녹아있는 다양한 합의와 타협의 흔적들을 예리하게 포착해 냄으로써 (무려 10여년 전에 쓰여진 책임에도 불구하고!) 근대성에 대한 다층적인 고찰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물론 이 이상 이야기를 진전시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성 이상의 의의를 찾기는 힘들 듯.)

  그러나 이 역사가 독재적인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소규모의 정치가나 학자들에 의해 대중에게 강요된 것이 아니었다. 데이비드 로웬탈이 지적한 것처럼, 반드시 자발적이거나 의식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라 해도 역사는 합의에 따른 것이다. 그것은 일상생활에서 직업적인 역사가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준에서 생긴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담론적이다. 칼 벡커Karl Becker의 '누구나 자기 자신의 역사가Everyman His Own Historian'를 사용하며... (p. 375.)

  '누구나 자기 자신의 역사가Everyman His Own Historian'라는 개념, (어딘지 모르게 해석은 까리하지만) 이후에 여기저기서 써먹을 일이 많을 듯 하다.



ps: 글을 쓰면서 끼워넣기가 좀 거시기했던 부분이 또 하나 있는데, 다른 맥락에서라도 써먹을 일이 좀 있을 것 같아 메모를 겸해서 인용해둔다. '주술적 정부'라는 개념이 눈길을 끈다.

  다시 말해 일본인의 정신은 정부의 지도자인 천황에 대한 이와 같은 숭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역사는 국민국가에 유용한 통일성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일본인의 정신과 본질처럼 내재적인 것으로 바꾼 '창조의 이야기'였다. 시라토리는 이러한 정부를 마쓰리고토(政; 주술적 정부)라고 불렀다. (pp. 25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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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14 20:48 2008/08/14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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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이 블로그에 글을 쓸 때마다 의문이 생기는 것 중 하나는 글을 쓰는 족족 이올린에서 '자세히보기' 히트수가 꽤나 올라간다는 것. 실제로 방문자 수가 그렇게 되는 것 같지도 않은데, 되지도 않는 글 후려갈겨도 대충 20히트를 넘기는 수준.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거나 서평 같은걸 쓰면 좀 더 올라가는 편인데, 그 덕에 가끔씩 이올린에 최근 추천글로 올라가곤 한다.

0-2. 운이 좋았던지 지난번에 썼던 '조선/한국의 내셔널리즘과 소국의식' 서평은 무려 70히트 돌파. ㅡㅡa 근데 이건 최근 추천글에 안 올라가더라. 왜일까 생각해보니 아마도 본문에 섞어쓴 쌍시옷과 욕설 때문이 아닌가 싶다만은... 아, 그러고보니 나도 어느새 히트수에 집착을... 아아아. 어쨌든 이번 리뷰에는 최대한 정갈한 언어로다가...

1. 주변환경이 그래서인지 그 놈의 내셔널리즘에 대해서 진짜 허벌나게 고민과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뭐 자세한 고민 내용은 바로 아래의 '조선/한국의 내셔널리즘과 소국의식' 서평을 보시면 되고... 암튼 이 책도 근대 한국의 내셔널리즘에 대한 또 하나의 이야기.

2. 저자인 앙드레 슈미드가 근대 한국의 내셔널리즘을 포착하기 위해 선택한 수단은 '신문'이다. 당대 최고 지식인들의 담론이 총집결된 신문은 그 시기의 최첨단 사상들과 논의들이 오고가는 장場이었다. '민족' 혹은 '국민'이라는 낯선 개념으로 사회를 재편해야 했던 지식인들의 욕망과 의식들이 신문에 녹아있는 것은 자명한 이치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민족 형성이라는 주제에 집중하여 방대한 자료를 꼼꼼하게 독해한 저자의 노력에는 일단 박수를 보낸다.

3-1. 근대 내셔널리즘의 형성을 탐구하는 것은 사실 연구자로 하여금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다.

  민족주의와 식민주의는 서로 모순되는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 자본주의를 승인한다는 점에서 민족문화에 대한 역사적 이해와 접근에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일본이 생산한 한국 관련 지식은 대부분 한국 지식인들이 민족을 사유하며 사용한 바로 그 단어, '문명화'라는 틀 속에서 형성되었다. (중략) 다만 한국으로서는 '계몽과 문명화'에 대해 일본과 동일한 약속을 공유하는 것이 주권을 공고히 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서 생산한 지식이 한국의 판단처럼 악의 없는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이 곧 밝혀지게 되었다. (p. 72.)

  오늘날 민족주의와 세계화는 종종 서로 반대되거나 배타적인 과정으로 인식되지만,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한국에서는 그 두 개념이 상호 보완적인 개념이었다. 즉 민족주의는 한반도가 세계 자본주의 질서와 세계화의 조류에 포함되는 것을 가속화시키는 수단이었다. 특히 신학문은 민족과 그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사고의 전환을 촉진시켰다. 이 시대에는 '글로벌리즘과 내셔널리즘의 결합도가 얼마나 높은가'에 다라 문명화의 수준이 결정되었다. 문명개화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널리 퍼뜨림으로써 한반도의 시공간적 정의가 역사적으로 크게 변화했다. 이제 네이션이라는 개념을 수용함으로써 한국은, 마치 원래부터 세계사의 과정에 참여해온 것처럼, 전 세계 모든 민족 공동체의 일원으로 보일 수 있게 되었다. (p. 110.)

  전자의 인용문이 내셔널리즘의 음험한 통합의 의도 혹은 근대가 던져주는 독배와 같은 성질을 나타낸다면, 후자의 인용문은 이미 네이션-스테이트라는 단위로 큰 틀거리가 짜여져버린 세계 속에서 현실적으로 정치적, 이념적 독립성을 가지기 어려운 피억압 민중들이 내셔널리즘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불가피성을 나타낸다 하겠다.

3-2. 내가 줄타기라고 표현한 것은 이 두 내용 간의 균형을 찾는 것이 근대 내셔널리즘 연구의 최대 난제 혹은 목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전자와 같은 입장에 투철하게 되면 당대의 현실적 불가피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지나치게 현재적인 관점이 될 우려가 있다. (박노자 식의 탈민족 논의가 현실 사회에 대해 보이는 비교적 정확한 통찰력이 역사 연구 속에서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점은 이를 반증한다.) 하지만 반대로 내셔널리즘의 불가피성만을 강조하게 되면 내셔널리즘이 궁극적으로는 지배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역사적 경험을 무시하는 한편 역사서술을 내셔널리즘의 내러티브에 가둬버리는 결과로 귀결될 수 있다. (박노자 식의 논의와 반대로 내셔널리즘 내러티브가 권력을 정당화하는 보수적 기제로 전화轉化하곤 했다는 점을 생각하자.)

4. 사실 이 책이 그런 점에서 양자의 건강한 접점을 도출했다고 보기는 조금 어려운 면이 있다. 결론은 확실히 전자 쪽으로 기울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의 글은 (여기서 말하는 로자 룩셈부르크 말고도) 근대 내셔널리즘 연구자들 또한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민족주의적 본능이 국제주의적 의식보다 훨씬 더 강력한 대중적 힘을 갖는다는 것을, 심지어는 사회주의 사회에서조차 그렇다는 것을 입증한 바 있다. 로자 자신 또한 "본능적 충동은 교육으로 얻은 모든 지혜보다 강하다"고 토로한 바 있지만, 정작 이 교훈을 민족문제에는 적용시키지 않았다. (임지현, 「로자 룩셈부르크와 민족문제」, 『역사비평』42, 역사비평사, 1998.)

  물론 여기서도 민족주의가 과연 '본능'이냐고 비판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만은... 그 부분은 머리 아프니까 일단 패스하고 다음에 얘기하고.

5-1.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을 흔한 근대 내셔널리즘 비판서 정도로 격하시키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내셔널리즘 형성이라는 일관된 관점에서 방대한 분량의 신문을 꼼꼼하게 분석했다는 점은 그 성실성은 물론이고 방법론의 측면에서도 (특히 한국의) 연구자들이 본받을 부분이 많다고 하겠다. 좀 더 참신하고 성실한 연구결과들이 더 많이 쏟아져서 근대 내셔널리즘에 대한 논의의 다양성을 더 넓혀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5-2. 이 책 얘기를 하면서 꼭 하고 싶었던 얘기 중 하나가 번역의 충실함이다. 그렇게 많은 책을 읽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내가 읽어본 번역서 중에서 가장 훌륭한 번역이라고 주저없이 말하고 싶다. 저자의 오류를 일일이 바로잡은 것은 물론이고 함께 참고할만한 다른 신문내용까지 꼼꼼하게 추가한 번역자의 성실함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위에 말한 내용의 성실함과 함께 번역의 성실함이라는 점에서 단연 탑클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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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11 19:55 2008/07/11 19:55
1. 역사학, 아니 인문학의 언저리에서 잠시라도 깔짝거려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머리 싸매고 고민해봤을 주제가 하나 있다. '내셔널리즘'. 음. 전국 각지의 인문학도들의 입에서 일제히 쌍욕이 울려퍼지는 듯 하구나.

2-1. 내셔널리즘은 근대의 전적인 산물이라는 둥 어떻다는 둥 하는 소리는 이제 기본적인 소리니까 일단 쌰랍. 내셔널리즘이 분명 근대국가가 보편적으로 가지는 성격인건 분명 맞다. 근데 그것이 각 국가들에게서 공통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 자, 나는 우리가 여기서 베네딕트 앤더쓴의 '상상의 공동체'에 나오는 '모듈module' 개념을 살짝 빌려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잉.

2-2. 앤더쓴은 '상상의 공동체'에서 민족주의는 서유럽, 아메리카, 러시아의 역사적 경험에 따라 세 가지 모듈을 가지고 있으며, 나중에 아시아 및 아프리카의 엘리트가 각자의 조건 및 선호에 따라 그 중 하나를 선택한다고 보았는데, 사실 이 설명을 그대로 채용하는 건 무리가 있지 않나 싶다. 각 식민지 엘리트(혹은 민중)들도 자기 나름의 고유한 네이션 공동체를 '상상'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2-3. 따라서 한국의 내셔널리즘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식민지 엘리트들의 '상상'력의 내용이 과연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 '상상력의 내용', 즉 한국 내셔널리즘만의 특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는 사실 아직까지 그다지 많은 편이 못 된다는거. 이러니까 인문학도들이 맨날 입에 쌍욕을 달고 사는겨.

2-4. 그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전근대 한국사회에 과연 '민족의식'이라는게 있었냐 없었냐는 건 진짜 하나도 안 중요하다는거고, 서구 내셔널리즘이 한국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는 소리도 틀렸다는 거. 분명히 근대의 어느 시점을 계기로 수입된 내셔널리즘은 한국사회에 이미 존재하던 '어떤 조건'(그게 민족의식인지 뭔지는 당연히 모르는 거고)과 융합되면서, 또 다른 내셔널리즘의 모듈로 변화했다는거여. 근데 이걸 여전히 '내셔널리즘'이라고 호칭해버리면 문제가 개소리 명창도 이만한게 없다는거다. 유 노 와람쌩? 한국의 내셔널리즘이랑 서구의 내셔널리즘이랑 같냐 이거여. (우리가 '꽃'이라고 호명해버리는 순간 수없이 많은 꽃들이 가지고 있는 특성은 단 하나의 단어 속으로 수렴되어버린다는 소리는 고등학교에서 배운 것이니, 무슨 소린지 모르겠으면 국어책 다시 보셈. 근데 이거 의외로 소쉬르가 나불거린 이론이라는거. 알고보면 울나라 고딩들 좆나 똑똑해.)

2-5. 따라서 내셔널리즘이 근대 한국이라는 특수한 조건을 만나서 산출된 독특한 모듈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내셔널리즘이라는 호칭을 탈피할 필요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식민지 내셔널리즘colonial nationalism이라는 단어를 제안해보고 싶은데, 나처럼 개털 근본도 없는 새끼가 하는 소리에 귀기울일 사람 있을리 만무하니 그냥 여기서나 지껄일 뿐. (그래도 방어적 민족주의니 뭐니 하는 궁색한 변명 같은 레토릭은 집어치우자, 좀.) 우야던동 내셔널리즘에 대한 최근 내 생각의 진전은 여기까지.

3. 앗, 책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개인적인 나불거림으로 벌써 여기까지 내용을 채워버리다니. 이런 씹숑구리. 그럼 책에 관한 평가는 짤막하게... ㅡㅡa

4-1. 아까 식민지 엘리트들의 상상력의 내용을 말했는데, 이 책의 저자는 그것을 '소국의식'에서 찾는다. 근데, 이 양반이 끝까지 "소국의식은 이거!"라고 말을 안 해준다. 뭥미. 알아서 제깍제깍 찾아서 이해하란 뜻이긴 하겠지만 그래도 좀 너무하잖아. 책 타이틀로까지 올려놨는데 이런 식으로 해도 되나, 이거. 대충 내 맘대로 정리해보자면 자신의 국가의 ‘작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필요에 따라 대국大國의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려는 생각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4-2. 근데 문제는 이 양반이 소국의식에 너무 좆나게 심하게 집착한다는 사실. 저자는 지나치게 소국의식을 근대 내셔널리즘과 직결시키려고 노력한 나머지 전근대사회와 근대사회를 무리하게 연결시켰고, 그 과정에서 조선 후기 사회가 보여주었던 사상적, 경제적 역동성을 간과해버리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무리하게 개념을 적용시키다보니 그게 정합하는 사례를 찾는 것에도 다소간의 무리가 따르게 되고, 그러다보니 그 사례들이 당대의 역사적 상황을 잘 반영하지도 못하는 결과에 빠져버린 듯 허다. 여기에 개념의 불명확함까지 더해지면서... 뭐... 이 정도만 하자. 더 써봐야 좋은 소리 안 나올 듯 하다.

4-3. 그래도 이거 기말 과제로 낼 때는 "나름 이러저러한 부분은 긍정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는 소리 정도는 써줬는데 어차피 조또 내 맘대로 쓰는 블로그니까 그런 인사치레는 생략.

5. 윗줄 보면 대충 눈치챘겠지만, 본 리뷰는 본인의 기말 과제에서 상당 부분 인용된 무성의한 리뷰임을 아울러 밝히면서... (그래도 쓰는데 40분 넘게 걸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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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10 22:15 2008/07/10 22:15
1-1. 외국인(혹은 외부인)의 시선으로 한국사회를 바라본다는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작업인 동시에 대단히 위험한 작업이기도 하다. 누구나 당연한 듯 인식했던 사실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참신함이 흥미로움을 더하는 요소라면, 한국사회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은 그 작업을 흔해빠진 '앗, 세상에 이런 일이'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위험성으로 작용한다.

1-2. 저자인 발레리 줄레조는 한국사회에서 아파트라는 거주형태가 가지는 인기와 보편성, 그리고 거기에 덧씌워진 권력의 욕망과 사람들의 오해들을 분석하는데 있어서 선언적으로 '그거 착각이거든용'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그 대신 거주민들과의 심층 인터뷰와 아파트 정책의 역사를 탐구하는 것을 통해 의도한 결론을 향해 독자들을 인도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지무지하게 참신한 결론이 도출된 것은 아니다만은... ㅡㅡa)

1-3. 그렇기에 전반적으로 한국사회에 대한 곱지만은 않은 시선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독자로 하여금 자연스레 결론을 수긍할 수 있도록 만드는 한편 서구인의 '깔보는 시선'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한다. 아마도 그것이 인류학적 방법론이 가질 수 있는 장점 중 하나겠지.

2-1. 남한이 경험했던 폭발적인 수량적 경제성장에 있어서 아파트라는 거주형태는 정말로 '현대적'인 것이었을지 모른다. 저렴한 '통제' 비용과 집단거주의 효율성 등은 밀도 높은 경제성장에 있어서 필수요소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현대적'이라는 말은, 당대 권력의 요구에 부응하는 형태라는, '당시대적'이라는 말로 바꿔 생각해도 적절할 것.

2-2. 하지만 닭장과 같은 구조에 가난한 서민들에게나 어울리는 것으로 인식되었던 아파트가 불과 30년만에 한국인 전반의 욕망에 부응하는 거주형태가 된 것은 권력의 욕망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아파트에 덧씌워진 이미지는 한국인들의 복잡한 세계관과도 조응한다.

3-1. 아파트가 현대적인 것의 상징이라면 전근대적인 것의 상징은 역시 한옥이다. 쪼그려 앉아야 하는 아궁이의 불편함, 계속 신발을 갈아신어야 하는 동선구조 등은 주부들에게 있어서 가장 강한 아파트로의 유인동기로 작용한다. 그 외에도 여러 요소들이 아파트를 서구적이고 현대적인 것으로 인식하게끔 만든다.

3-2. 한국인에게는 당연하게 인식되는 이 사실이, 외국인의 눈으로 보면 좀 다른 모양이다. 신발을 신는 공간과 신지 않는 공간이 교차 배치된 아파트의 구성상 신발을 연신 갈아신어야 한다는 점은 여전할 뿐더러 온돌과 같은 바닥난방 구조도 서구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양식이다. 더욱이 흔히 베란다에 배치되곤 하는 장독들 역시 한옥과 아파트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실제로 서구에서는 이미 아파트는 실패한 거주형태이고 그 숫자 역시 소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에는 이미 존재하지도 않는 아파트가 한국에서는 서구 근대성과 진보의 상징으로 성공적으로 자리잡았다는 사실은 확실히 구미를 당기게 하는 사건임에 틀림없다.

3-3. 저자는 대충 이 정도에서 논의를 정리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논지를 좀 더 끌고 나가자면, 아파트라는 공간이 상징하는 혼종성hybridity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서구에서 수입된 '집단거주의 양식'과 '권력의 필요', 서구적인 것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 '한옥의 구조'가 혼종된 '한국의 아파트'야 말로 혼종성의 전형인 동시에 한국에서 아파트가 서구와 다른 결과를 산출한 원인이 아닐까. (아니 뭐... 그냥 해 본 소리. 요새 이 쪽으로 책을 읽었더니 뭘 봐도 다 이렇게 보이는구만. 쩝.)

4. 번역서의 문제 중 하나는 매끄럽지 않은 문장인데, 이 책은 전문번역가의 작품인만큼 번역투답지 않은 매끄러운 문장을 자랑한다. 다만 전문번역가의 번역에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해당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이 좀 딸린다는 점. 브루스 커밍스의 책 'Korea's place in the sun'을 '양지 속의 한국'으로 번역하는 센스란... 물론 이건 번역자의 탓은 절대 아니다. 한국사 전공자가 아니니 직역을 하는 것이 당연하지. 하지만 교열팀에서 국내 출판명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현대사'였다고 괄호라도 달아줬어야 했다. 다른 데도 아니고 후마니타스에서 이게 뭐니 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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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09 08:48 2008/07/09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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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너무 길어서 못 썼는데, 왼쪽 표지 그림에서 보시다시피 '자결自決과 반식민 민족주의의 국제적 기원'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대충 여기까지만 보고서도, '아, 이 양반이 하고 싶은 얘기가 허벌나게 많은가 보구나잉'하는 느낌이 밀려온다. 아오.

1-2. 이런 식으로 글을 쓰면서도 다소 쪽팔린다. 내가 보고 싶어서 본 글도 아니고, 이 내용을 100% 온전히 이해했다고 자부하기도 영 미심쩍은 부분이 많기에 뭐라뭐라 코멘트 붙이는게 옳은가 싶다. 그래도. 수업시간에 강제로 읽은 책이라 해도. 내가 느낀 이 느낌을 망망대해의 네트워크 세상에 쬐까 풀어제끼는거, 그게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의 의무 비슷한거 아니겠나.

2-1. 전공이 한국사니까 한국사와 관련지어 말하자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3.1운동'의 관계는 여러분들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바이다. 1918년 초에 미국 대통령 윌슨이 의회에서 연설했던 14개조 중에 각 식민지 민족들의 '자결'을 인정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에 고무되어 3.1운동이 일어났단다... 뭐 이런거.

2-2. 그리고 그게 사실은 일본을 포함한 승전국의 식민지에는 적용 안 된다는 거도 국사시간에 안 졸았던 청년이라면 다 알고 있다. 오, 그래 그래.

3. 자, 여기까지 연구가 진행되었다고 하자. 그럼 우리에게 윌슨의 테제는, 3.1운동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윌슨의 테제는 그저 배부른 식민모국의 어떤 정치지도자가 좋은 소리 한번 들어보려고 지껄인 가당찮은 소리에 불과했나. 그럼 거기에 자극받아 일어난 3.1운동은, 있지도 않은 소리에 속아 넘어간 아둔한 변방의 민족들이 저 혼자 좋아서 날뛴 한판의 쑈에 불과했던건가. 결국 그런건가. 윌슨의 테제와 반식민 민족운동은 그저 그런 오해로 점철된 일련의 막간쑈였나.

4. 그러니까 여기서 멈추면 무지하게 곤란하다, 이 말씀. 과연 그 시기에 피식민 민족들은 윌슨의 테제에 어떻게 반응하였고, 자신들의 실천에서 이 놈을 어떤 식으로 전유했는가를 밝혀내는 것이 이들 운동의 한계와 의의를 동시에 짚어낼 수 있다는 거다. 다시 말해서, 이 냥반들이 멍청하게 윌슨의 테제를 보고 따라한게 아니라 자기 나름의 조건과 상황에 맞게 이걸 변용하고, 다시 자기들 나름의 운동으로 만들었다는거다. 이처럼 다양한 현실태들을 그냥 '오해'니 '오독'이니 하는 말로 정리해버리면 곤란합니다.


5. 위 사진은 중국의 5.4운동 사진이다. 잘 보면 가운데에 '대동세계大同世界'라고 쓰여진 피켓이 있다. 저 말은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의 당시 중국어 번역이다. 뭔가 어감이 확 달라진다. 아니 이건 대체 뭥미;;; 중국에 영어할 줄 아는 사람이 없어서 저런 상황이 생겼을까.

  이 때 식민지 근대성은 서구 근대성, 아메리카 근대성, 사회주의 근대성처럼 근대성의 한 모듈(module)로 이해된다. 이러한 모듈들은 중심부에 의한 방사나 확산의 결가가 아니라 접촉의 결과이며, 그 접촉이 낳은 충격과 잡종성(hybridity) 등이야 말로 실정성으로서의 한국 근대성의 양상이다. (중략) 이 때 번역은 단순히 기원언어(서구어 혹은 일본어)에 목표언어(한국어)를 1대1로 대응시키는 작업이 아니라, 하나의 개념을 둘러싼 담론적 실천 및 이 실천의 정치와 결합된다. (강내희, 「한국의 식민지 근대성과 충격의 번역」, 『문화과학』31호, 2002.)

  In the end, however, the reception of Wilson's rhetoric among nationalists in the colonial world was not defined by the intentions of its author but by the perceptions, goals, and contexts of its often-unintended audiences. 그러나 결국 윌슨의 레토릭에 대한 식민지 민족주의자들의 반응은 화자의 의도가 아니라, 의도치 않은 청자들의 의식과 목적, 그들이 처한 맥락에 따라 결정되었다. (pp. 33~34.)

6. 저자가 계속 천착하는 문제는 바로 이런 쪽이다. 어차피 윌슨의 테제에서 윌슨이 백인우월주의자였다느니, 그가 구성한  전후 세계질서가 어땠는지에 대한 사실 등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해석의 주체는 그가 아니니까. 피억압민족들이 어떻게 중심부의 테제에 반응해 그것을 재구성하고, 다시 그것을 중심부에 되먹이는가 하는가가 이 책의 중심 주제라 보시면 되겠다.

7. 아, 마지막 덧붙임 말. 윌슨의 14개조에는 '자결self-determination'이라는 말이 없다. ㅇㅇ. 단어만 없는게 아니라 그런 개념 자체가 아예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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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04 12:59 2008/05/04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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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정보공유의 평등시대를 열어주신 와레즈 덕분에 영화는 물론이고 음악에 만화까지 원하는대로 내려받아보는 세상이다. 상품商品이란 합당한 댓가를 치룬 다음에 즐겨야 한다는 기본적인 자본주의 질서마저 전복되는 이 혁명적 상황.

1-2. 이런 혁명적 상황에, 그간 수없이 많은 블로그에 퍼져나간(예전 내 블로그에도 실었더랬지) 카툰들을 모아놓은 책의 존재는 또다른 의미에서 전복적이다. 내놓은 사람도 자살행위요, 사는 사람도 바보짓 아닌가 이거.

1-3. (아무리 생각해도) 만화는 책으로 봐야된다. 그 내용이 어떤 것이든간에 일단 방바닥에 배 깔고 엎드려서 봐야 된다. 그게 만화다. 모니터 앞에서 마우스 휠 굴려가며 보는 것도 안 되고 책상머리에서 정자세로 보는 것도 안 된다. 만화에는 만화의 정도가 있는 법. 그 정도를 걷기 위해 나는 또 만화를 책으로 산다.

2. 만화에 덧붙여지는 사람들의 코멘트나, 베스파라는 것이 가지는 상징 때문에 '바이 바이 베스파'는 매우 순수한 이야기로 보일 수 있다. 근데, 별로 안 그렇다는거. 사실, 남자와 여자가 사랑하는 이야기 쓰는데 섹스 얘기 안 하는거, 좀 비겁하지 않나? 하긴 뭐... 된장찌개에 된장 들어가는거 굳이 말 안 해도 누구나 다 알지만...

3-1. 원체 짧은 책이라 (다 보는데 한 10분?) 딱히 평을 붙이기도 애매하니 지난 글에서처럼 20자 평으로 해볼까.

3-2. "순진하진 않은데, 순수하긴 하다. 적극 추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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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6 23:14 2008/04/26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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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에 관한 기본적인 자세, 즉 사관史觀은 그 오랜 시간 동안 꾸준히도 변해왔다. 몇몇의 영웅 혹은 리더를 통해 파악하려는 시도도 있었고, 뒤를 이어 장기적으로 지속되는 일상생활과 관습을 통한 것, 계급 간의 투쟁을 통한 것 등이 등장했다. 무질서해보이는 녀석들이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일정한 경향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뒤로 갈수록 이전의 사관에서 배제되었던 '소리없는 다수'를 발견하려는 노력이 강해진다는 것.

2. 역사학은 기록을 더듬는 학문이다. 옛사람들이 남긴 문서와 유물 등의 흔적을 통해 당대인들의 삶을 해석하는 것이 곧 역사학이다. 이미 사라져버린 것들을 연구하는 것이 역사학이고, 그 '사라져버린 것'과 지금의 '역사가'를 이어주는 흔적들을 우리는 '사료'라고 말한다. 정확히 말하면 역사학은 과거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료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3-1.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 중 하나는 개체성이 존재한다는 것. 다시 말해 집단 속에 있다 하더라도 하나하나의 개체들이 각각의 개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집단으로 호명되는 순간 이같은 개체성이 발현될 여지는 급격히 줄어든다. 문제는 '역사학'이라는 학문이 가지는 거시적인 특성상, 탐구대상인 인간이 언제나 집단으로만 설정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각 개체의 생생한 삶의 결이 드러날 여지가 역사학에서는 없다.

3-2. 아니, 없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왔다.

4. 역사학과 인류학의 접목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사료를 남기지 못한 소리없는 대중 개개인의 삶을 복원시켜내는 것. (헉헉.) 또한 그 대중 속에서도 약자의 위치에 있었던 하위신분 출신이나 여성들의 목소리를 복원시켜내는 것 역시 중요하다. 역사인류학의 문제의식이 정치해질수록 글이 길어지고 다양한 수준의 연구가 요구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5-1. 물론 여기에는 넘어야 할 산들이 많다. 우선 기억의 주관성. 주관적이어서 못 써먹겠다는게 아니라 주관적이기 때문에 내용이 가변적이라는 뜻이다. 기억은 발화發話되는 순간의 구술자의 감정이나 주변상황, 채록자와의 관계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다. 불완전한 기억력이나 고의적인 누락과 추가가 발생할 수 있을 뿐더러 채록자 역시 자신의 의도에 따라 구술내용을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하거나 선택할 수 있다. 역사학의 구술사적 접근에 가해지는 비판이 주로 이 지점에 집중되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이 부분에 대한 명확한 대응담론이 필요하다.

5-2. 역사학에서 구술사적 방법을 채택하는 경향은 많지만 여전히 구술을 문서기록을 보완하는 정도로만 사용하거나 구술의 타당성을 문서기록을 토대로 재단하려는 경향도 가끔 보인다. 구술자료의 가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 구술사적 접근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사람들 자체가 풀어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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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1 11:21 2008/04/21 11:21
공제욱, 정근식 외, 문화과학사, 2006.
1. '근대'의 절대성에 대한 문제제기라든지, 수탈론이나 근대화론이나 그 '근대'를 우리가 성취해야 할 역사적 선善으로 상정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라는 식의 이야기는 이제 지겨우니 하지 말자. 역사학의 변방에서 잡스런 지식나부랭이 좀 끄적인 사람 치고 이 정도 모르는 사람 없겠지.

2-1. 문제는 그것이다. 이 책을 쓰신 분들 조차도 '식민지 근대성'이란 무엇인지 통일된 인식을 안 갖고 계신 듯 하다는 것. '식민지 근대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인지, 각각의 연구들은 '식민지 근대성'이라는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이거 제대로 설명할만한 사람 한국에 얼마 안 될걸. (많으면 1000명이나 되려나.)

2-2. 아니 그렇다고 나는 잘 알고 있다... 이런 건 아니고. 이제 석사 2학기째인 놈이 알면 뭘 알겠냐.

3. 그러니까 그런거 아니겠나. 지금까지 권력과 일상은 일방적인 관계로 상정되어 왔는데 실상을 따져보니 그렇지 않더라는 것. 다시 말해 권력주체가 권력을 행사하는 순간에 발생하는 그 '공간'에서 자기 할 얘기 하고, 자기 하고 싶은 일 하는 피치자들의 모습들이 중요하다는거다. 왜냐고? 이 말은 곧 권력이 그들과의 관계를 통해 그 행사되는 양상이 재구성된다는 얘기고 바로 이 지점이 빈틈없어 보이는 권력의 '틈'이라는거 아닌가.

4. 그리고 '근대'(혹은 '근대권력')과 접촉하는 사람들은 이걸 자기 나름대로 '번역'을 하는데, 이것이 어떻게 전유되는가가 그 사람들의 의식구조를 보여주는 모양일 수 있다는 거. 예컨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오독誤讀'된 것이나, 모던보이와 신여성들의 어색한 서구식 생활방식이 서구문화를 '왜곡'시켜 수입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들. 그걸 그렇게 '오독'와 '왜곡'으로 몰아가면 안 된다는거다. 사실 '번역'이라는건 1:1로 대응시켜 변환시키는 행위가 아니라, 그 개념(혹은 문화)들을 둘러싼 실천과 연관된 행위라는거죠. 문화라는거, 일방적으로 전달되는게 아니라 서로 교잡하고 횡단하는 잡종성을 가진 거잖아. (이거 벌써 쌍팔년도 더 전에 나온 얘긴데 한국사에서는 이제서야 이 얘기 붙들고 씨름하고 있네.)

5. 그나마 최근에 나온 책이라서 그런지 가장 정치하고 단단한 문제의식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 역시 논문모음집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지라 문제의식의 일관성은 좀 부족하지 않나 싶다. 한국사학계에서 '식민지 근대성론'에게 펼쳐진 무한한 가능성과 함께, 그것이 갈 길 또한 허벌나게 멀다는 점도 함께 노출하고 있네. 아, 결국 발바닥 땀나게 공부해야 된다는 거냐. 이건 뭐... 이 따위 결론이 나오고 말아서 나도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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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12 20:20 2008/04/12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