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진주시내에서 221번이나 33번 시내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면 사천시와 접하고 있는 강주마을에 도착할 수 있다. 내가 유년시절을 보내기도 했던 그 마을에는 인근에서도 잘 알려진 연못이 있는데 따로 이름은 없고 그냥 다들 '강주연못'이라고들 부른다.
[Dog君, 2009.]
[Dog君, 2009.]
2. 몇년전까지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관리하던 동네 산책로 정도로 유지되었는데 언젠가부터 관리가 소홀해지고 황소개구리까지 범람하면서 먹이사슬이 파괴되고 결국 물도 거의 말라버린 채로 방치되고 있던 것을 시에서 상당한 돈을 들여 대대적으로 재정비사업을 추진한 끝에 많은 사람이 찾는 관광지로 거듭났다. 이번에 가보니 축제도 추진하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좀 묘하긴 했다.
[Dog君, 2009.]
3. 유년시절의 추억이 여럿 얽혀있던 곳이라 내게 이 곳은 사적지나 관광지라는 느낌이 무척이나 약하다. 겨울밤이면 깡통에 담은 잿불로 쥐불놀이를 즐기기도 했고, 용돈없는 날엔 이 근처에서 빈병을 주워다가 아이스크림으로 바꿔먹었던 기억도 있으니까.
[Dog君, 2009.]
4. 주말이면 외지에서 몰려든 관광객으로 북적대지만 평일 오전처럼 한가한 시간에는 동네 촌로들이 산책을 즐기는 정도라서 혼자서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기에 이만한 곳도 드물다. 간혹 황소개구리 소리가 들려와 흠칫 놀랍기도 하지만... 연못 주위를 한바퀴 도는 것도 좋지만 이곳저곳에 편의시설도 꽤나 구비되어 있고 나 어릴 적에 큰 나무가지에 매달아 두었던 그네도 아직 여전해서 이런저런 재미가 쏠쏠한 곳이다.
[Dog君, 2009.]
5-1. 이곳의 연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설異說들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고려시대의 진영터라는 설이 중론으로 인정받는 분위기이다. 전근대가 전공은 아니라서 가타부타 말할 처지는 못되지만 근거들이 조금 부족하지 않나 하는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5-2. 고려 말 배극렴이 강주장군으로 있으면서 왜구에 대비하기 위한 진영을 구축했다는 기록과 신라 말에 강주장군 유문이 견훤에게 항복했다는 기록, 그리고 진주 지역 인근에 남아있는 '강주'라는 지명이 이곳 밖에 없다는 점을 함께 미루어 볼 때 이 연못을 그 강주진영터로 비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5-3. 하지만 강주康州라는 지명은 고려 성종 이전까지 진주 지역 전체를 일컫는 지명이었기 때문에 이 지명을 근거로 이 곳을 진영터로 규정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는 주장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 내가 살았던 '강주'는 한자 표기가 '康州'가 아니라 '姜州'였는데 말야. 진주문화원에서 펴낸 '진주이야기 100선'에서는 좀 민망한 다른 설화도 소개하고 있지만 거기 10년 넘게 살았던 나도 처음 듣는 얘긴데;;;
5-4. 봄이 형 말마따나 전통이란건 언제나 만들어지는 거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지 뭐. 어디 하루이틀인가.
1-1. 뛰어내려 가든 누워있다 가든 가는건 가는거. 그렇게 '그나마' 존중할만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나가는 한해가 되고 있다. 나야 그에 대한 기억이 좋은 것보다는 나쁜 것이 훨씬 더 많지만 (노무현 때도 그랬던 것처럼) 그의 죽음이 나의 개인감정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래서 나도 그의 죽음에 대해 마냥 시니컬할 수만은 없겠지만은 이하의 말투에서 묻어나오게 될 예의없음에 대해 미리 양해를 구하면서...
1-2. (역시 노무현 때도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한국사회는 스스로가 망자亡者에 대해 얼마나 관대한 사회인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는 죽음과 함께 민주화의 아이콘으로 거듭나는 중이다. 괴한들에 납치되어 생사의 기로에 놓이기도 했으며 한때는 군부에 의해 사형수 신세가 된 적도 있다. 그리고 그는 대통령이 되어 남북관계의 중요한 한 획으로 평가받는 6.15 공동선언을 이끌어내고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1-3. 엄연한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것이 그의 공功이다. 분명히 (어떤 의미에서) 그는 민주주의의 진전에 한 몫을 했고 한반도 평화정착에 공헌했다.
2. 하지만 나는 께름칙하다. 그 뒤에 있는 이야기들을 잊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3-1. 6.15 공동선언으로 얻은 저 미소 뒤에 농성 중인 롯데호텔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가혹한 진압이 곧바로 이어졌다.
3-2. 내 기억이 맞다면 저기 서있는 경찰은 그냥 전경이 아니고 '경찰특공대'였다. 임산부가 포함된 여성노동자들이 저들의 눈에는 테러범으로 보였나보다.
4-1. 2003년 초 즈음이었던 것 같다. 어느날 새벽 사측의 가압류로 인한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한 명의 노동자가 분신자살했다.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
4-2. (좀 가소로워 보이기는 하지만) 내가 두산소주를 마시지 않게 된 것은 이 때부터이다. (물론 그 말이 노동환경이라는 측면에서 진로가 좀 더 낫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 반응은 자제 점.)
5-1. 김영삼 정부 5년보다 김대중 정부 4년(2002년 제외)간의 구속노동자 수가 더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2001년에만 240명의 노동자가 구속되었으니 1주일에 5명 꼴이다. 그리고 그 해에만 내 주위에서 3명의 선배가 불시에 구속되었다. 그 해의 일도 아니고 3년 전의 일을 가지고 말이다. 3년 동안 그거 아껴놓는다고 얼마나 참았을까...하고 우스갯소리 아닌 우스갯소리를 했던 기억이 난다.
5-2. 김대중은 독재와 싸웠을지 모르지만 대통령이 되어서는 그 독재가 남긴 유산을 청산하기보다는 그것을 자기 방식대로(정확히는 '더 세련되게') 활용하는 쪽을 택했다.
6. 우리는 민주화의 아이콘으로서의 김대중도 기억해야 하지만 이 땅에 정리해고와 신자유주의로 대표되는 새로운 삶의 패러다임을 강요했던 김대중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새로운 패러다임'이 (그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간에) 극한의 이기주의와 배금주의로 이어졌기 때문이고 또 그것이 결국에는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밀어올리는 하나의 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1. 진주MBC사옥에서 진주역 방면으로 가는 길인 새벼리길을 지나다보면 왼쪽으로 갈색의 팻말이 하나 서있다. 전국 최초의 백정해방운동이었던 형평衡平운동을 이끌었던 백촌栢村 강상호姜相鎬 선생의 묘소다. 불과 몇년전까지만 해도 주인없는 무덤 마냥 방치되어 있었던데다가 정비 이후에도 정기적인 관리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어서 내가 찾았을 때는 잡초가 무성했다.
[Dog君, 2009.]
2. 강상호는 1887년 경남 진주에서 강재순의 4남 1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강재순은 정3품 통정대부를 지내기도 한 천석꾼으로 부유한 가정환경 덕에 강상호는 일찍부터 신학문에 눈을 뜰 수 있었다. 진주는 전통적으로 경상우도 학맥의 중심이었고 당시에는 축산업과 면포생산의 중심지로 신문물의 유입이 활발했다. 1910년에 진주에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여학생만을 위한 반이 생기기도 했는데 이런 조건들 속에서 강상호가 차별없는 교육의 중요성에 눈떴으리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3. 그는 일찍부터 다양한 분야의 사회운동에 참여하여 국채보상운동, 학교설립운동, 3.1운동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1920년 즈음에는 이미 진주 일대에서는 상당한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무관하게 그는 운동의 전면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었던 것 같다. 1917년에 그는 자신의 마을에 살던 몇몇 농민들이 너무 가난하여 세금을 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오랫동안 대납해주었는데 이 사실은 무려 8년동안 계속되고 나서야 신문지상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다.
4. 3.1운동과 관련하여 옥고를 치르기도 한 강상호는 장지필, 이학찬 등과 뜻을 같이하여 1923년에 드디어 형평사를 조직하고 백정들의 권익을 증진하기 위한 운동을 시작한다. 형평운동은 초기부터 일본 수평운동의 급진성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작되지만 강상호는 결코 운동을 비합법운동의 수준에서 고민하지 않았다. 강상호는 형평운동을 급진적인 계급투쟁으로 끌고가기보다는 합법운동의 틀 내에서 최대한을 획득하는 쪽으로 이끈다.
5. 하지만 장지필을 비롯한 형평운동 급진파와의 의견충돌은 계속되었고 강상호는 결국 형평사에서 손을 떼고 신간회 진주지회에서 잠시 활동한 후 공식적인 사회활동에서 모두 손을 뗀다. 1930년대 들어 형평사는 친일단체로 변질되고 말았는데 이때 다시 강상호는 억지로 부위원장으로 추대된다. 하지만 강상호는 곧 낙향해버리고 만다. 사회운동에 환멸을 느꼈는지 가산을 모두 써버렸기 때문인지는 알 길이 없다. 사회활동을 접은 후 강상호는 일제의 식민지 교육에 저항감을 느껴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도 않고 창씨개명도 거부하는 등 식민권력과의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 일생을 살았다. 합법운동의 틀 속에서 형평운동의 활로를 모색했지만 그것이 식민권력에의 완전한 투항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6. 강상호의 이름은 한국전쟁기 북한군의 점령기간에 다시 등장한다. 북한군에 의해 또다시 억지로 진주시 인민위원장으로 추대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온화한 성품의 그는 결코 북한군의 의도에 부합하는 냉정한 계급투쟁의 전위가 될 수 없었다. 강상호는 다시 이 자리에서 물러나지만 강상호의 이름이 가지는 선전효과를 잘 알고 있는 북한군은 그 이후에도 한동안 그가 진주시 인민위원장인 것처럼 선전했다. 그 때문에 북한군 퇴각 후 그는 부역자로 고초를 겪는다. 이 즈음에 이르게 되면 가산은 거의 탕진되어 강상호는 끼니를 해결하는 것도 마땅치 않은 형편이었다. 그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신교육을 받은 지식인이 되었지만 정작 본인은 자식을 사립학교에 보낼만한 형편도 되지 못했던 것이다. 노년의 강상호는 그렇게 사회적 관심으로부터도 멀어지고 가난에 시달리던 끝에 쓸쓸하게 죽음을 맞는다.
[Dog君, 2009.]
7. 친일과 반일이라는 거대한 이분법만으로 일제시대를 바라본다면 강상호는 과연 어디에 위치될까. 식민권력에 얼마만큼이나 무모하게 저항했느냐만으로 당대의 지식인을 평가한다면 사실 강상호와 같은 인물은 배치될 곳이 마땅치 않다. (상당한 수준의 사회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강상호가 '독립유공자'라는 유일한 국가적 판단잣대를 통과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강상호는 식민권력과의 협상과 교섭을 통해 형성된(혹은 '식민권력이 허용한') '공간'을 활용하면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고자 했다. 식민지의 회색지대에 존재했던 형평운동과 강상호의 사회적 위치는 해방 이후 수십년동안 형평운동이 갖는 사회적 의미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게 하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친일과 반일이라는 관점만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복수의 역사’ 속에 배치되는, 형평운동과 같은 식민지 시대의 사회운동에 대한 새로운 연구관점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Dog君, 2009.]
8-1. 강상호 묘소 바로 옆에는 그의 부인의 묘(그냥 전주이씨라고만 써있어서 이름을 알 수가 없다)도 함께 있다. 자고로 남편이 사회운동에 열심이면 부인이 불만이 많다던데 어쩐 일로 이 부부는 나란히 묻혀있다. 어찌보면 좋아보이기는 하는데 나름 이런저런 비석도 서있는 강상호의 묘에 비해 부인의 묘는 나무로 된 작은 팻말만 하나 박혀있어서 썩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다. 미루어보건대 생전의 강상호였다면 두 사람의 묘를 똑같이 치장하라고 한소리 하지 않았을까. ^^
[Dog君, 2009.]
8-2. 묘 앞에는 강상호의 모친(이 역시도 그냥 전주이씨라고만 써있다;;;)의 시덕비施德碑가 서있다. 다들 이것에 대해서는 좀체 주목을 안 했는지 관련자료도 찾을 길이 없어서 어쩐 연유로 시덕비까지 세워놨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중에 시간이 되면 좀 찾아볼까 싶다.
이분법이라는게 확실히 무서운게
얼마전 싸이월드 뉴스에 '친일파 인명사전에서 몇사람 빠진다'는 얘기가 나왔을 때
그 밑에 달린 악플(?)들 후르륵.. (주로 친일파들이 명단에서 빠지니까 화가 난다는 내용의)
제가 친일잔재 청산을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지만
사실 '친일'이라는 단어 하나를 단순한 이분법적 도식의 범위 밖에서 정의내리기 위하여 수 많은 자료를 검토하고 연구하고 이 사람은 아니다라는 확신이 섰을 때에야 비로소 결론을 내리게 되는 과정을 피상적이나마 알고있는 저에겐
그 베플들이 약간은 야속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