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2. 운이 좋았던지 지난번에 썼던 '조선/한국의 내셔널리즘과 소국의식' 서평은 무려 70히트 돌파. ㅡㅡa 근데 이건 최근 추천글에 안 올라가더라. 왜일까 생각해보니 아마도 본문에 섞어쓴 쌍시옷과 욕설 때문이 아닌가 싶다만은... 아, 그러고보니 나도 어느새 히트수에 집착을... 아아아. 어쨌든 이번 리뷰에는 최대한 정갈한 언어로다가...
1. 주변환경이 그래서인지 그 놈의 내셔널리즘에 대해서 진짜 허벌나게 고민과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뭐 자세한 고민 내용은 바로 아래의 '조선/한국의 내셔널리즘과 소국의식' 서평을 보시면 되고... 암튼 이 책도 근대 한국의 내셔널리즘에 대한 또 하나의 이야기.
2. 저자인 앙드레 슈미드가 근대 한국의 내셔널리즘을 포착하기 위해 선택한 수단은 '신문'이다. 당대 최고 지식인들의 담론이 총집결된 신문은 그 시기의 최첨단 사상들과 논의들이 오고가는 장場이었다. '민족' 혹은 '국민'이라는 낯선 개념으로 사회를 재편해야 했던 지식인들의 욕망과 의식들이 신문에 녹아있는 것은 자명한 이치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민족 형성이라는 주제에 집중하여 방대한 자료를 꼼꼼하게 독해한 저자의 노력에는 일단 박수를 보낸다.
3-1. 근대 내셔널리즘의 형성을 탐구하는 것은 사실 연구자로 하여금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다.
민족주의와 식민주의는 서로 모순되는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 자본주의를 승인한다는 점에서 민족문화에 대한 역사적 이해와 접근에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일본이 생산한 한국 관련 지식은 대부분 한국 지식인들이 민족을 사유하며 사용한 바로 그 단어, '문명화'라는 틀 속에서 형성되었다. (중략) 다만 한국으로서는 '계몽과 문명화'에 대해 일본과 동일한 약속을 공유하는 것이 주권을 공고히 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서 생산한 지식이 한국의 판단처럼 악의 없는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이 곧 밝혀지게 되었다. (p. 72.)
오늘날 민족주의와 세계화는 종종 서로 반대되거나 배타적인 과정으로 인식되지만,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한국에서는 그 두 개념이 상호 보완적인 개념이었다. 즉 민족주의는 한반도가 세계 자본주의 질서와 세계화의 조류에 포함되는 것을 가속화시키는 수단이었다. 특히 신학문은 민족과 그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사고의 전환을 촉진시켰다. 이 시대에는 '글로벌리즘과 내셔널리즘의 결합도가 얼마나 높은가'에 다라 문명화의 수준이 결정되었다. 문명개화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널리 퍼뜨림으로써 한반도의 시공간적 정의가 역사적으로 크게 변화했다. 이제 네이션이라는 개념을 수용함으로써 한국은, 마치 원래부터 세계사의 과정에 참여해온 것처럼, 전 세계 모든 민족 공동체의 일원으로 보일 수 있게 되었다. (p. 110.)
전자의 인용문이 내셔널리즘의 음험한 통합의 의도 혹은 근대가 던져주는 독배와 같은 성질을 나타낸다면, 후자의 인용문은 이미 네이션-스테이트라는 단위로 큰 틀거리가 짜여져버린 세계 속에서 현실적으로 정치적, 이념적 독립성을 가지기 어려운 피억압 민중들이 내셔널리즘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불가피성을 나타낸다 하겠다.
3-2. 내가 줄타기라고 표현한 것은 이 두 내용 간의 균형을 찾는 것이 근대 내셔널리즘 연구의 최대 난제 혹은 목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전자와 같은 입장에 투철하게 되면 당대의 현실적 불가피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지나치게 현재적인 관점이 될 우려가 있다. (박노자 식의 탈민족 논의가 현실 사회에 대해 보이는 비교적 정확한 통찰력이 역사 연구 속에서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점은 이를 반증한다.) 하지만 반대로 내셔널리즘의 불가피성만을 강조하게 되면 내셔널리즘이 궁극적으로는 지배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역사적 경험을 무시하는 한편 역사서술을 내셔널리즘의 내러티브에 가둬버리는 결과로 귀결될 수 있다. (박노자 식의 논의와 반대로 내셔널리즘 내러티브가 권력을 정당화하는 보수적 기제로 전화轉化하곤 했다는 점을 생각하자.)
4. 사실 이 책이 그런 점에서 양자의 건강한 접점을 도출했다고 보기는 조금 어려운 면이 있다. 결론은 확실히 전자 쪽으로 기울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의 글은 (여기서 말하는 로자 룩셈부르크 말고도) 근대 내셔널리즘 연구자들 또한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민족주의적 본능이 국제주의적 의식보다 훨씬 더 강력한 대중적 힘을 갖는다는 것을, 심지어는 사회주의 사회에서조차 그렇다는 것을 입증한 바 있다. 로자 자신 또한 "본능적 충동은 교육으로 얻은 모든 지혜보다 강하다"고 토로한 바 있지만, 정작 이 교훈을 민족문제에는 적용시키지 않았다. (임지현, 「로자 룩셈부르크와 민족문제」, 『역사비평』42, 역사비평사, 1998.)
물론 여기서도 민족주의가 과연 '본능'이냐고 비판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만은... 그 부분은 머리 아프니까 일단 패스하고 다음에 얘기하고.
5-1.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을 흔한 근대 내셔널리즘 비판서 정도로 격하시키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내셔널리즘 형성이라는 일관된 관점에서 방대한 분량의 신문을 꼼꼼하게 분석했다는 점은 그 성실성은 물론이고 방법론의 측면에서도 (특히 한국의) 연구자들이 본받을 부분이 많다고 하겠다. 좀 더 참신하고 성실한 연구결과들이 더 많이 쏟아져서 근대 내셔널리즘에 대한 논의의 다양성을 더 넓혀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5-2. 이 책 얘기를 하면서 꼭 하고 싶었던 얘기 중 하나가 번역의 충실함이다. 그렇게 많은 책을 읽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내가 읽어본 번역서 중에서 가장 훌륭한 번역이라고 주저없이 말하고 싶다. 저자의 오류를 일일이 바로잡은 것은 물론이고 함께 참고할만한 다른 신문내용까지 꼼꼼하게 추가한 번역자의 성실함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위에 말한 내용의 성실함과 함께 번역의 성실함이라는 점에서 단연 탑클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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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를 신경쓰다니
되지도 않게 타락했군
ㅠㅠ...
저도 조회수 은근 신경쓰이더군요.
예전엔 100분토론이 나를 먹여살리더니 이제는 전당대회가 나를 먹여살리고 있음..
그래도 역시 꾸준한 밥벌이는 시간을 달리는 소녀 -_-;;
나는 이미 날려먹은 지난 블로그의 글이
리퍼러 기록에 그리도 많이 보이더라.
검색엔진으로 오는건 8할이 그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