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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솔직히 말하자면 좀 불편하다. 앞에 쓴 '러시아 혁명과 레닌의 사상'도 그렇고 이것도 마찬가진데, 이처럼 근본적이고 강퍅한 이야기를 던지는 책이 나는 솔직히 좀 불편하다. 당장 내가 원칙주의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가 한 때 상당한 수준의 원칙주의자였음을 상기한다면 이런 마음의 무거움은 더해진다. 거기다 며칠 전 어떤 술자리에서 한 선배에게 "그건 너무 근본주의적이에요."라고 대들었던 것까지 생각하면야.

1-2. 최근에 잠시 김규항을 멀리 했었다. 몇 가지 일들이 누적되어서인데 김규항이 일반적인 안건들에서 보여주는 올바른 자세들이 어떤 특정한 사안들에 대해서는 전혀 발휘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음을 발견해서였다. 하지만 최근에 그러한 이유만으로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것은 생각 외로 편협한 짓임을 깨달았다.

2. '종교'라는 키워드 역시 내가 오랫동안 고민하고 있는 주제 중 하나인지라 이런 식의 글을 보면 내심 많이 반갑다. 꽤 여러 해 전부터 인간에 대한 존중과 사랑을 폐기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종교 하나쯤 가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고민을 계속하고 있기도 하고 말이지.

3-1. 김규항이 이 책 내내 천착하고 있는 것은 당대의 맥락에서 예수를 바라보는 일이다. 현재의 사람들은 성경에 기록된 예수의 기적들을 두고서 그것이 진실이냐 아니냐는 식의 아둔한 논쟁에 빠져있지만 김규항은 복음서가 지어지던 당대의 맥락과 예수가 가지고 있던 사상의 일관성에 근거하여 성경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 기존의 예수가 가지고 있던 이미지가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반말이나 찍찍 뱉으면서 세상에 체념하고 마음수양이나 할 것을 설파했던, 지금 우리가 매일 TV에서 만나는 정치인 혹은 흔한 종교인들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면 김규항이 이야기하는 예수는 사회적 소수자들에게도 동등한 사회적 지위를 복원시켜주고 사회적 불의에 눈감지 않으면서도 매일매일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다.

3-2.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기성 사회와 불협화음을 일으키지 않은 종교란 없었다. 예수는 권력화된 유대교와 로마의 압제에 항거했고 불교는 카스트제도의 몰인간성과 맞섰으며 이슬람교 역시 기존의 권력과 끊임없이 마찰했다. 하지만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종교는 이미 그 자체가 권력이 되어있거나 혹은 권력과 불화하지 말 것을 설파한다. 우리는 예수와 석가모니의 삶과 고민을 얼마나 이어받고 있을까.

3-3. 박완서의 글이었을거다 아마. 새로 태어난 아이에게 많은 사람들이 축복의 말을 건네면서 누구처럼 되어라 어떻게 되어라하고 덕담들을 건네지만 예수님처럼 살거라라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예수처럼 산다는 것이 돈과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이상을 말함을 모두 다 알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4. 신앙의 힘이란 무엇일까. 종교의 미덕이란 무엇일까. 고민이 오늘 조금 더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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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4 17:19 2009/07/04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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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잘 따져보면 자연계와 인간계(물론 이 두 가지가 딱 잘라 구분되는 건 아니지만)는 참 닮은 구석이 많다. 특히 '변화'라는 측면에서는 더 그렇다. 자연계의 변화를 연구하는 것이 아마도 진화론일텐데 이 진화론에서 진화를 설명할 때는 점진적 변화가 누적되는 것이라기보다는 돌연변이나 어떤 특정한 사건을 통해 급진적인 변화가 단번에 일어난다고 이야기한다. (부디 맞길. 난 자연과학과 안 친하거든.)

1-2. 아마도 인간계에서는 '혁명'이 그러한 사건에 속할거다. 가장 짧은 시간 내에 가장 많은 것들이 변화하는 일련의 사건의 덩어리들. 우리가 혁명이라고 부르는 역사적 사건이란 대개 이런 것들이다. '혁명'이라 하면 얼핏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몇 가지 사건들이 있지만 역시 '혁명'이라고 할 때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지고 동시에 가장 많은 오해를 받고 있는 것은 단연 러시아혁명이다.

2-1. 러시아 혁명의 비극의 씨앗은 그것의 무대가 러시아였다는 사실에 있었다. 애초의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에 의한다면 사회주의 혁명은 러시아가 아니라 서유럽 국가에서 일어났어야 했다. 미성숙한 부르주아 계급과 노동자 계급, 여전히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농민 계급, 일천한 민주주의적 경험 등은 애초부터 러시아 혁명을 제약하는 조건들이었다. 사회주의의 터전이 마련되지 못한 곳에서 사회주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이 뭔가 와꾸가 영 안 맞는 상황.

2-2. 물론 이 점은 러시아의 사회주의자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러시아 혁명의 운명이 러시아에 있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영국이나 프랑스와 같은 서유럽 국가에서 동시다발적인 사회주의 혁명이 발생하지 않으면 낙후된 러시아의 사회주의도 얼마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를 어쩐담. 서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은 하나같이 캐발렸다는 거. 거기다 혁명 이후 발발한 백군白軍과의 내전, 세계대전의 여파 등을 거치면서 혁명의 중추를 담당했던 노동계급도 점차 힘을 잃어갔다. 그렇다. 가만 있어도 입에서 욕이 나오는 존니 난감한 상황.

2-3. 힘을 잃은 혁명의 속에서 반反혁명의 기운이 움트는 것은 어쩌면 당연지사일지도 모르겠다. 민주적 기반이 붕괴됨과 발맞춰 스탈린이 급부상했다. 뭐 여기부터는 모두들 잘 알고 있는 바와 같다. 그 이후 전세계의 사회주의 혁명은 스탈린의 지도 아래 두 가지 중 하나의 결과를 맞이했다. 캐발리거나 위성국가가 되거나.

3.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이제 얼추 100년이 다 되어가는 이 시점에 볼셰비키의 원칙을 되살리는 일은 사실 아무리 봉실봉실한 언어를 사용한다해도 다소간의 불편함을 동반하는 일이다. 게다가 요즘과 같은 포스트 뭐시깽이의 시대에 계급이니 노동이니 투쟁이니 하는 소리는 아무래도 얼추 한 20년 쯤 전의 화석언어 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강퍅한 원칙주의에 좀 더 공감해야 할 의무가 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거의 모든 권리는 그 강퍅한 원칙주의적 혁명이 달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4. 혁명은 많은 변화를 수반하는 동시에 가장 많은 가능성을 열어놓는 시기이기도 하다. 모종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혁명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상가집에서 옛친구들 만난 자리에서 술 몇 잔 마시고 혁명이니 쟁가니 부르는 짓거리들은 이제 좀 그만두자. 쪽팔리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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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4 16:28 2009/07/04 16:28